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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인천 강화(18) - #광성보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용두돈대 #신미양요 #어재연장군 #신미순의총

by 포리시스 2013. 5. 14.

   인천 강화(18) - #광성보 #광성돈대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용두돈대 #신미양요 #어재연장군 #신미순의총

 


   이곳 광성보에는 세개의 돈대와 포대가 있다. 지난번에 광성돈대와 함께 일부 유적지를 포스팅 했는데, 나머지 돈대와 주변 풍경, 광성포대, 그리고 손돌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에는 돈대에 대하여 각각 글을 올리려다 한 지역의 안에 모두 자리하므로 한꺼번에 둘러 보았던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 나누었다.

 

[손돌목돈대 - 많은 사람들의 탐방이 참 좋았다]

 

   <신미순의총>을 지나 푸르러만 가는 숲길을 걷다보면 한창 아름답게 피어난 철쭉의 군락지를 볼 수 있다. 고려산의 진달래 만큼이나 폭넓게 장관을 이루지는 않지만, 돈대 주변의 풍경에 맞게 잘 가꾸어져 있어 보기가 참 좋았다. 우측으로 성곽의 돈대가 있다. 이곳이 <손돌목돈대>다. 그리 높지 않은 곳이지만, 강화해협이 내려다 보여 마치 높은 봉우리에 위치한 굳건한 요새처럼 느껴진다.

 

[손돌목돈대 내부]

 

   바다의 건너편으로 녹음이 드리워진 김포의 풍경과 멀리 초지대교의 모습도 한 눈에 들어온다. 이 돈대 역시 둥근 원형이다. 돈대의 반대쪽과는 달리 해안가로 숲이 우거지지 않아 민둥산의 분위기를 주지만, 오래전부터 관측의 목적으로 울창한 수림을 조성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요인이라 여기고 싶다.

 

[돈대에서 내려다 본 강화해협]

 

   이 돈대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축조된 돈대로 원래에는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고 하지만, 돈대의 내부에는 현재 무기고의 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곽의 사이로 포좌는 3개가 시설되어 있고, 해안의 반대편으로 출입문이 시설되어 있다.

 

[돈대 포좌의 구멍으로 들여다 본 내부]

 

   돈대의 넓이는 778m2에 성곽의 길이가 108m 라고 한다. 7단으로 다듬돌로 성축을 하고 그 위에 여장을 둘렀다. 출입문에 보수중이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외관상 온전해 보이지만, 시설의 보수가 덜 된 것 같다. 고종 8년(1871)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라는 안내문이다.

 

[철쭉 군락지와 어우러진 손돌목돈대]

 

   해안가 언덕으로 화사하게 핀 철쭉의 군락지와 어우러진 손돌목돈대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이런 평온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오래전에 정말 그러한 일이 있었는가 의구심을 갖게 한다. 군데군데 조경수가 서 있고, 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이곳으로 나들이 온 많은 사람들의 포토존으로 손상이 없겠다. 그래서 인증샷을 남기기 위해 여념이 없던 모습을 담아 보았다.

 

[역사탐방 중인 선생님과 학생들]

 

   손돌목돈대에서 해안가로 내려가는 길목의 우측 군락지를 지나면 해안가에 다다라 우측으로 녹음을 먹음은 길다란 뚝이 있는데, 이곳이 <광성포대>다. 언듯보면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의 바닷물을 막기 위한 방죽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껏 보아왔던 돈대처럼 축성을 하지는 않았지만, 복토를 하여 높다랗게 뚝을 쌓고 그 사이 사이에 포좌를 시설하였다.

 

[광성포대]

 

   몇기의 포가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확인을 하지는 못했지만, 10여기 가량의 대포가 사용되었을 것이라 여겨 볼만한 길이다. 양 절벽을 사이에 두고 시설되어 있어 외성의 역할도 하였을 것으로 보여지는 이 포대는 한 줄로 이어져 있지만 가운데 지형의 영향으로 후에 계단을 시설하였을 것이라 생각이 된다.

 

[흙을 쌓아 만든 토성처럼 여겨진다]

 

   해안선에 아주 가까이 위치하고 있어 적과의 교전시 인근 <용두돈대>와 더불어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여겨 보았다. 사실 이 포대로 내려오는 길목에 세워놓은 손돌목돈대와 용두돈대의 함락 당시 모습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처참하다 싶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의 설명이다.

 

[신미양용 당시 사진기록]

 

   1. 점령당한 후 손돌목 돈대와 조선군 시체들(1871. 6. 11)] - 신미양요 기간 동안 조선군과 미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은 광성보 였다. 특히 손돌목 돈대는 조선군 사령관인 중군 어재연 장군이 직접 지휘하여 격렬하게 반격을 가하던 요새로서 미군 측에서는 맥키(Hugh Mckee) 해군 중위와 두 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조선측에서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조선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흰옷 차림의 조선군 전사자 시체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다.

 

[어림잡아 10여기 이상의 포좌가 시설된 것 같다]

 

   2. 손돌목 돈대의 외부 모습 - 무너진 성벽과 파괴된 포자, 힘없이 내려진 깃발, 즐비한 조선군 전사자의 모습, 미군의 무차별 포격에 의해 파괴되고 점령당한 조선군 마지막 보루의 처참한 모습이다.

 

   3. 용두돈대의 원경 - 1871년 6월 1일 미군 탐측선을 향해 최초로 포격을 시작한 돈대, 6월 11일 손돌목 돈대의 함락과 더불어 하단에 있는 광성돈대와 해협으로 길쭉하게 뻗어있는 용두돈대도 곧 미군에 의하여 함락되었다. 함락 직후 미군들은 광성보 전역에 설치되어 있던 군사시설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파괴하고, 각종 군기와 대포들을 전리품으로 노획한 다음 6월 12일 오전 소속 함정을 타고 작약도의 기함 정박지로 철수하였다는 기록이다.

 

[해안선에 근접해 있어 접전시 피해가 가장 클 듯 싶다]

 

   다음은 이곳 지명인 <손돌목>에 관한 이야기다. 강화도는 한강 입구에 있는 섬이다. 그러나 여느 섬과는 달리 육지와의 사이를 흐르는 물길(염하)이 빠르고, 또한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서 여간 숙련되지 않은 뱃사공은 이 물길을 함부로 건너지 못한다고 한다.

 

[용두돈대에서 본 광성포대]

 

   인조 5년(1627), 후금(뒷날의 청)이 쳐들어 왔다. 임금이 서둘러 강화도 피난길에 나섰을 때 <손돌>이 길안내를 맡았다. 그러나 강화도로 가는 뱃길은 험했다. 급한 물살과 그에 따라 뒤집힐 것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점점 더 험한 물살의 가운데로 배를 몰아갔다. 임금은 속으로 '이 뱃사공이 나를 죽이기 위해 배를 이곳으로 모는 것이 아닐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돌을 죽이라 명령했다.

 

[용두돈대 가는 성곽길]

 

   손돌은 죽기전에 말했다. "제가 띄우는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가십시오. 그러면 안전하게 강화도에 도착할 것입니다."

 

   손돌은 죽었고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을 따라가던 배는 강화도에 도착했다. 임금이 강화도에 발을 내딪자,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물길은 더욱 험해졌다. 임금이 천천히 말했다.

 

[용두돈대 풍경 - 앞 바다의 지명이 손돌목이다]

 

   "으음, 내가 손돌을 의심하였구나. 나의 잘못이다. 여봐라, 손돌의 시신을 잘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

 

   지금 강화도의 광성보에서 마주 보이는 김포의 덕포진(대곶면 신안리)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물길을 손돌의 목을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에는 큰바람이 분다고 한다. 이를 손돌의 한숨, 손돌바람, 손돌추위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고 한다.

 

[돈대 성곽길]

 

   손돌목 해안으로 불쑥 튀어나간 듯한 절벽을 따라 이루어진 성곽이 <용두돈대>다. 바다의 위에 축성된 듯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이 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천연 요새로서 손돌목돈대에 속해 있는 <외곽 초소 겸 포대>였다고 한다.

 

[성곽길에서 본 돈대]

 

   고종 8년(1871) 포대가 설치되면서 정비된 곳으로 1977년 강화 전적지 정화보수사업을 하면서 용두돈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병인(丙寅).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며, 1977년 성벽을 복원하면서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돈대 내 기념비]

 

   그리 길지는 않지만 해안으로 쭉 뻗은 듯 한 성곽길을 따라가면 원형에 가까운 돈대 내에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비의 양쪽으로 당시 사용되었던 소포가 전시되어 있다. 좁은 성곽길을 따라 원형의 돈대내에 들어서면 언듯 바다 위의 성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기념비 양쪽으로 전시된 소포]

 

   동쪽의 해안으로 여러 돈대가 있지만 광성보가 제일 볼만하다던 어느 분의 말씀처럼 좁은 이 공간을 걸었던 시간이 꽤나 흘른것 같다. 지나간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오를수는 없지만, 현장을 다니며 그 곳에서 직접 지득하는 모든 감각에서 아주 조금은 그 현장을 보듬어 볼 수 있었던 시간은 아닐까 싶다.

 

[손돌의 묘가 있을 해협 건너의 김포]

 

   건너편의 김포와 사이에 폭이 넓은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이라 여겨지기도 하지만, 오가는 갈매기 모습에서 이내 이곳이 바다의 물길이라 느낄 수 있다. 국운을 위한 많은 병사들의 숭고한 죽음,... 전란이 가져다 준 손돌의 무고한 삶,... 조상들이 지켜오면서 남겨 놓은 우리나라의 이야기들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