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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기행

충남 서산(2) #서산보원사지 #보원사지 석조 #보원사지 당간지주 #보원사지 5층석탑 #법인국사

by 포리시스 2018. 7. 24.

충남 서산(2) #서산보원사지 #보원사지 석조 #보원사지 당간지주 #보원사지 5층석탑 #법인국사



   서산보원사지는 사적 제316호이다. 작은 내를 사이에 두고 당간과 5층 석탑이 마주보고 서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절터이다. 완전한 발굴 작업이 끝났는지 모르겠다. 늘 시간에 쫓기다보니 블로그엔 항상 지각을 한다. 하지만 택리지의 저자처럼 내 맘엔 방방곡곡 우리의 국토 열심히 누벼보자는 생각은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다.


[아드님과 함께 따라하기]


   개심사로 이어지는 산길 입구에 서 있던 두 장승의 아래에서 아들과 취한 포즈가 훗날 참 많은 기억을 되돌려 줄 것만 같다. 열심히 따라와 주었던 울 아들도 아빠의 기억을 조금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사적 제316호 보원사지]


   안내문의 내용을 기록해 보았다. 백제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보원사의 옛터로 통일신라 ~ 고려초에 크게 융성하였고 왕사, 국사를 지낸 법인국사 탄문이 묻힌 곳이며 주변에 100여개의 암자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전하는 대사찰이다.


[5층석탑 주변 경관]


   이 절터에 신라시대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대형 철불 2구가 있었던 것을 중앙 박물관에 전시중이며 1967년도에는 백제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는 등 유물로 보아 당시에는 매우 융성했음을 알 수 있으며 백제와 신라, 고려초 불교미술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있는 사적지이다.


[작은 내를 가르는 돌다리]


   유물로는 백제계의 양식 기반위에 통일신라와 고려초의 석탑양식을 갖춘 5층석탑(보물 제104호), 통돌을 장방형으로 파내어 만든 한국 최대의 석조(보물 제102호), 975년(광종 26)에 법인국사가 입적하자 광종의 지시로 세운 보승탑(보물 제105호), 법인국사의 생애가 기록된 보승탑비(보물 제106호), 사찰에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불기나 괘불을 걸기 위해 만든 당간지주(보물 제103호)가 있다.


[5층 석탑, 보승탑, 보승탑비]


   가까이에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한 백암사지 등 불교유적이 집중되어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곳이다.


[출토되었던 철불 모형인 듯]


   [보원사지석조]

   화강석의 돌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절에서 물을 담아 쓰던 용기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칠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102호 보원사지석조]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아 간결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거대한 크기로 인해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내부에도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밑바닥은 평평하고 한쪽에 물을 내보내는 구멍이 있을 뿐이다.


[석조 가로방향]


   현재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큰 석조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978년(고려 경종 3년)에 제작된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을 비롯한 다른 석조물들과 관련시켜 볼 때 고려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세로방향의 석조]


   [보원사지 당간지주]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석조물이다. 당간은 절 앞에 세워 부처나 보살의 위엄과 공덕을 표시하고, 사악한 것을 내쫓는 의미를 가진 당이라는 깃발을 다는 깃대이다.


[5층석탑과 마주한 당간지주]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에 놓여 있다. 마주보고 있는 두 지주의 안쪽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바깥쪽에는 양측 가장자리를 따라 돌대가 돋을 새김되어 있다.


[5층석탑과 마주하고 있는 당간지주]


   기단부가 없어진 것을 화강암으로 새로 보강하였는데, 주위에 흩어져 있는 여러 가지 석재들로 보아 원래는 직사각형의 기단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103호 보원사지당간지주]


   [보원사지 5층 석탑]

   통일신라 ~ 고려초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이다. 목조탑파에서 석조탑파로 변화되는 과정의 형식이며 아래층 기단에 사자상을, 위층 기단에 부중상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보물 제104호 보원사지 5층 석탑]


   기단부에 우주, 탱주를 세웠고 탑신부 1층 밑에 받침돌 한 장을 끼워 넣은 것과 옥개석의 물매가 평활하며 끝이 살짝 들어 올려진 것 등이 백제계 양식이다. 또한 옥개석 받침을 4층으로 한 것은 신라계 양식을 가미한 것으로 백제지역에 신라이후 세워지는 석탑의 공통된 양식이다.


[오랜 세월 마모된 조각상]


이 탑은 전체적으로 미려하고 경쾌하며 안정감이 있다. 상륜부에는 긴 찰주만 남아있지만 1945년 광복 전까지 아름다운 복발, 양화, 보륜, 보개, 수련, 용차, 보주 등의 부재가 완전하게 있었다고 한다. 1968년 해체 복원시 사리 내갑, 외갑, 사리병, 납석소탑 등이 출토되어 부여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오랜 세월 마모된 조각상]


   [법인국사 보승탑비]

   법인국사의 탑비이며 978년(고려 경종 3)에 경종의 지시로 세워졌다. 비몸 높이 230, 폭 115, 글자 수 5,000여자나 되는 거비이며 국공을 파견하여 이들이 세우게 했다. 이분은 신라말 ~ 고려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탄문이다. 비문의 내용은 탄문의 일대기이며 900년(신라 효공왕 4)에 출생하여 15세에 계를 받고 968년(광종 19)에 왕사, 974(광종 25)에 국사로 지내다가 이곳 보원사에 와서 975년(광종 26)에 입적하였다.


[보물 제104호 법인국사 보승탑(우)과 보물 제105호 법인국사 보승탑비(좌)]


   역대 왕들과 가까웠으며 국가 시행 불사를 도맡아 시행하였고 특히 광종은 왕권강화 작업기간 이후 정신적인 지주로서 왕사, 국사로 가까이 있게 했으며 입적하자 매우 슬퍼하였다. 이분은 학승을 제자가 많아 말년에 보원사에 올 때 선, 교승 천여명이 영접했음 이곳을 <고산>이라 하고 여기에 와서 묻혔다. 이것으로 보아 어렸을 때 이곳에서 수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105호 보승탑비]


   [법인국사 보승탑]

   법인국사의 사리를 모셔놓은 975년에 건립된 부도 탑이다. 법인국사는 신라말 ~ 고려초의 고승으로 법호는 탄문이다. 900년(신라 효공왕 4)에 출생하여 15세에 장의산사에서 계를 받았으며, 968년(고려 광종)에 왕사, 974년(광종 25)에 국사가 되어 이곳 보원사에 와서 975년(광종 26)에 입적하였다.



   당시 임금인 광종이 슬퍼하며 부도를 세울 것을 지시하여 국공에 의하여 세웠다. 이 탑은 팔각원당형의 형태이며 중대석의 조각은 매우 아름답고 상대석 난간 형태를 두른 것이 보기 드문 특징이다. 옥개석에 3단 받침을 둔 것은 부도나 탑을 막론하고 이 지방에서 보기 드문 형식이며 추녀, 서까래가 살짝 들어올려져 날렵한 것 등은 탑에서와 같은 백제계 양식의 특징이다.


[보물 제104호 보승탑]


   국토의 구석구석을 둘러 볼 때마다 현장에서 들려주는 무언의 이야기는 참 재미있다. 과거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이 어렴풋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만큼 발전된 시대와 비교해 정교한 미가 느껴지기도하고,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들을 느껴 보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나의 환경에서 내공을 쌓는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어르신들 말씀에 알아야 면장을 한단다. ㅎㅎ  <옹>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