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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행

서울 종로구(13) - #서울 사직단 #사단 #직단 #사적 제 121호

by 포리시스 2021. 7. 14.

   서울 사직단(社稷壇)

 

   서울 종로구 사직로 89 에 위치한 <사직단>은 사적 제121호 이다. 조선 건국과 더불어 왕궁의 동쪽에 종묘를, 서쪽에 사직단을 세워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던 고대 농경사회에서 국토와 오곡은 국가와 민생의 근본이었다. 사직은 토지신인 국사신과 곡물신인 국직신, 두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단을 쌓고 봉사하므로 사직단이라고 했다.

 

서울 사직단

 

우리나라의 사직단의 역사를 살펴보면, 삼국사기와 문헌비고에 고구려는 391년(고국양왕 9)에 국사를 세웠고, 신라는 783년(선덕왕 4)에 사직단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판단할 때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사직단 북문 - 이곳의 유일한 삼문이다.

 

고려시대의 사직단에 대해서는 '고려사'를 통하여 991년(성종 10) 처음으로 도성인 개경 서쪽에 사직단을 만들었고, 그 후 사직단을 수축하거나 사직단에서 행한 제례를 정비한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단 주위의 낮은 담을 '유'라 하고 유문이 있으며, 그 주위를 둘레담이 둘러있다.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사직단은 "주례"에 종묘는 도성의 동쪽에, 사직은 도성의 서쪽에 둔다는 원칙에 따라 지금의 위치에 세워졌다. 사직단은 태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나서 종묘와 함께 가장 먼저 조영한 도성 시설물로, 1395년(태조 4) 정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4월에 완성되었다.

 

안향청

 

1406년(태종 6) 6월에는 주변 지형에 맞게 사직단을 개수하였고, 이를 관리하며 지키는 관리를 두었으며, 나라 안의 각 고을에도 사직단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서울 사직단은 동서쪽에 두 개의 단을 나란히 만들어 동쪽에는 토지신에게 제사지내는 사단을, 서쪽에는 곡식신에게 제사지내는 직단을 배치하였다.

 

유 - 단 주위의 낮은 담

 

사직단은 한양도성 서쪽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의 한 줄기가 내려온 지형과 조화되도록 조성되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남북을 향하지 않고 약간 동남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이는 도성쪽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이러한 배치는 엄격하게 남북 방위를 지키며 조성되는 중국의 사직단과 차이를 보인다.

 

사직단 내부 풍경

 

1414(태종 14) 4월에 단 주위에 담을 둘렀으며, 담 안에는 신실과 신문을 세웠다. 사직단을 관장하는 사직서는 1426(세종 8) 6월에 담장 밖 북쪽에 설치하였다. 사직단 제향인 사직제는 매년 중춘(2월), 중추, 납일에 세 차례 거행하였으며, 이외에도 가뭄때에는 기우제를 행하는 등 각종 고제가 있었다.

 

유문

 

<국조오례의>의 '사직단도'를 근거로 사직단의 배치를 살펴보면, 가장 중심에 사단과 직단이 있고, 이 단을 낮게 둘러싸고 '유(유)'라고 불리는 담이 있으며, 그 밖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시 둘레담이 있다. 유와 둘레담에는 각각 사방의 중앙에 홍살문이 있고, 둘레담의 북문만 삼문으로 되어 있다.

 

둘레담의 서문

 

유에 설치한 문은 유문이라고 하는데, 기와를 얹은 맞담인 유는 한 변의 길이가 25보, 곧 150척이나 된다. 북유문과 북신문 사이에는 판위가 있고, 판위에는 서쪽 홍살문을 거쳐 북신문 사이에는 넓은 터와 길이 나 있다. 이곳은 제의에 참여하는 관계 관원이 반열하는 곳으로 왕과 왕세자 및 제관의 대기 장소로 쓰이며, 친제 때에는 이 사이의 길을 신로로 사용하였다.

 

서문에서 본 직단(앞), 사단(뒤)

 

<세종실록>의 '오례조"에 따르면, "사직단은 남쪽에 위치하여 북쪽을 향하니, 너비가 2장 5척이요, 높이가 3척이며, 사방으로 섬돌이 나와 있는데 각각 3단이다. 방위에 따른 색갈의 흙으로 꾸미고, 황토로 덮었다. 석주(석주)의 길이는 2척 5촌이요, 너비는 1장인데, 그 위쪽을 뾰족하게 하고, 아래쪽의 반을 흙으로 북돋웠으며, 단 위의 남쪽 섬돌 위에 당하게 한다.

 

복원중인 전각의 장소에서 본 사직단

 

양유는 매유마다 25보이니, 이것을 장으로 계산하여 6척으로써 1모로 삼는다면 15장이나 된다."고 기술되어 있다. 사직단 크기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있었으나 건축 형식은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사직단의 부속 건물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안향청과 정문이다.

 

여러 전각들이 복원되어지는 공간이다. - 옛 모습

 

안향청은 재궁으로 쓰인 사직서의 중심 건물로 숙종 때부터 안향청이라 불렸다. 사직단 정문은 사직단 신문이다.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뒤 재건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단층의 맞배지붕이다. 사직단의 제사는 통감부가 1908년 칙령으로 향사에 관한 시설을 대부분 철폐시킴에 따라 폐지되었다.

 

남문에서 본 사직단

 

1911년에는 사직서의 건물과 사직단 일대의 대지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이어 사직단은 경성부에 이관되어 1922년에 사직단 주변에 도로를 내고 공원을 조성하면서 부속 건물들이 철거되었고, 1924년 공원으로 개설되었다가 1940년 도시 공원이 되었다. 이로써 인왕산 자락에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던 사직단은 그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동문에서 본 사직단

 

조선시대에 사직단은 경복궁 앞 육조거리 우측 첫 번재에 자리잡은 예조 옆길을 따라 서쪽으로 곧장 가면 인왕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해방 후 1962년에는 도시 확장으로 정문이 뒤로 이건되었고, 1970년대에는 북쪽에 종로도서관과 동사무소, 파출소가, 서쪽에 수영장 등이 건립되어 주변 환경이 다시 크게 훼손되었다. <네이버 백과>

 

몇 년 전에 이곳 명칭이 <서울 사직단>으로 명명되었다. 다른 곳에도 사직단이 있음이다. 현재 서쪽으로 훼손되었던 전각들이 복원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