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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기행

#오현단 #오현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 우암 송시열

by 포리시스 2021. 5. 9.

<오현단>은 제주자치도 기념물 제1호이다.

 

오현단 전경

조선시대 제주에 이바지한 오현을 배향한 <귤림서원>의 옛터에 조성한 제단이다.

 

오현단 내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 5기

<오현>1520(중종 15)에 제주에 유배 왔던 충암 김정[1486 ~ 1521, 본관은 경주. 자는 원총 호는 충암. 고봉.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 등의 옹호로 금산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오현단 내역을 기록한 비

1534(중종 29)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1499 ~ 1547, 본관은 은진. 자는 미수. 태수,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교리. 부응교 등을 역임하면서 당시 유행한 사치풍조를 배격하고 교육진흥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 오히려 그 일파에게 미움을 받아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오현단 전경

1601(선조 34)에 제주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1570 ~ 1652,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 호는 청음. 석실산인. 서간노인.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의 역옥을 다스리기 위한 안무어사로 파견되었다],

 

귤림서원 장수당 옆에 새로 건립된 오현비

1614(광해군 6)에 제주에 유배 왔던 동계 정온[1569 ~ 1641, 본관은 초계. 자는 휘원. 호는 동계. 고고자. 1610(광해군 2)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후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서 피살되자, 정항의 처벌과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이 분노하여 이원익과 심희수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하였다],

 

우암 송시열 글씨 '증주벽립' 증자와 주자의 학문에 정진하자

1689(숙종 15)에 제주에 유배 왔던 우암 송시열[1607 ~ 1689,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1689년 숙의장씨가 낳은 아들(뒤의 경종)의 세자책보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미움을 사 모든 관작을 삭탈당하고 제주로 유배] 등 다섯 사람을 이른다.

 

1871(고종 8)에 귤림서원이 헐린 뒤에 1892(고종 29)에 김의정을 중심으로 한 제주 유림이 귤림서원의 자리에 제단을 조성했다.

 

지금은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 5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 제단은 1578(선조 11)에 제주목 판관 조인후가 가라쿳물 동쪽으로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인데, 1667(현종 8)에 충암묘를 현 오현단으로 옮겨 와 사당으로 삼았다.

 

송시열의 시 [여든이 넘은 늙은이가 / 만리 푸른 물결 한가운데 왔도다 / 말한마디가 어찌 큰 죄랴마는 / 세번이나 내쫓겼으니 앞이 막혔구나 / 북녁 대궐을 향해 / 머리를 돌려보지만 / 남쪽 바다에는 계절풍만부네 / 귀한 옷을 내리셨던 / 옛 은혜를 생각하면 / 외로운 충성심에 눈물만 / 흐르는구나]

1659(효종 10)에 목사 이괴가 이곳의 장수당을 재()로 바꾸어 귤림서원이라 했다.

 

김정의 시 [외딴 섬에 버려져 외로운 넋이되려하니 / 어머님 두고감이 천륜을 어기었네 / 이 세상을 만나서 나의 목숨마져도 / 구름을 타고가면 하늘문에 이르리 / 굴원을 따라 떠돌고도 싶으나 / 기나긴 어두운 밤 언제면 날이새리 / 빛나던 일편단심 쑥밭에 묻게되면 / 당당하고 장하던 뜻 중도에서 꺾임이니 / 아 천추만세에 내 슬픔을 알리라]

1682(숙종 8)에 사액을 받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 등 네 사람을 모셨다가, 1695년에 송시열도 함께 모시면서 다섯 현인을 배향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