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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기행

#경북 대구 #달성 #사적 제62호 #달성 서씨 #서침 #순종황제 #향토역사관

by 포리시스 2023. 3. 29.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에 있는  <달성>은 사적 제 62호이다. 달성공원으로 많이 불리워지며 잘 가꾸어진 조경수와 잔디밭은 시민들의 좋은 안식처가 될 것 같다.

 

달성공원 입구 시민의 문

 

약 30~40여분 가량 성곽길을 따라 걸으며 시내 풍경을 감상해 볼 만하고, 향토역사관에 들러 이 지역의 유물들을 감상해 볼 수도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슴류의 동물들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얼룩말 등 동물이 있고, 조류, 물개, 코끼리 등 성곽 아래로 이동하면서 여러 동물들을 만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하는 나들이도 괜찮을 것 같다.

 

달성 관풍루

 

개인적으로 동물들의 냄새가 많이 풍기고 있어 사적지 내에 동물원을 만들어 놓은 것은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움의 마음도 들었다.  

 

동.북쪽의 성벽 위

 

안내문의 내용이다. 대구는 신라때 달구화현이라 불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742~765, 재위)때에 이르러 비로서 대구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북쪽의 성벽 위

 

달성의 이름은 이 달구화 또는 달불성에서 유래된 것이다. 달성은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있는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축성한 것이 특징이다.

 

북.서쪽의 성벽 위

 

달성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그들의 생활 근거지에 쌓은 성곽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뜻한 햇살에 물개들이 나와 있다.

 

성벽의 아래층 위에는 조개무지 유적이 있고, 목책의 흔적도 있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상 가장 이른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서쪽의 성곽에서 내려오면 작은 연못

 

삼국사기에는 신라 첨해왕 15년(261)에 달벌성을 쌓고 <나마극종>을 성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달성서씨 유허비

 

신라에 병합된 뒤에는 군사요지로 중시되었으며, 그 후 고려 공양왕 2년(1390) 토성에 석축을 더했다.

 

지체부자유아를위한모금함

 

조선조 선조 29년(1596)에 석축을 더하고 <경상감영>을 이곳에 둔 일이 있다.

 

아시아코끼리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위 길이는 약 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성벽 상층부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토성위에 석축을 가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석재서병오선생예술비 - 한국의 서화가

 

아래는 <이몽일> 풍수학박사의 달구벌 풍수산책 <달성 서씨 가문의 명당 삼절(상)>에서 모셔온 글이다.

 

서침나무와 대한민국 어린이헌장 - 서침나무는 회화나무이다. 서침의 자는 성묵. 호는 구계. 본관은 달성 서씨로 조선 초기 문신이다.

 

달성 터는 빼어난 입지성과 구역성으로 인해 삼한시대에는 지역 유력 부족의 거처 및 요새지로 사용되었고, 신라와 고려시대엔 관아 터로 사용되었다. 

 

달성공원에 봄이 오고있다.

 

신라 원성왕은 경주 월성을 닮은 이 달벌성으로 수도를 옮기려 한 적도 있다.

 

가이즈카향나무

 

고려 정종 때 봉군제에 따라 이 토성이 달성 서씨들에게 사전으로 주어져 그들의 세거지로 되었지만,

 

공원 내 향토역사관

 

조선 세종 때 그 지형이 곡식을 되는데 쓰이는 원통 모양의 나무 그릇인 <말>과 같아서 방어용 진지에 적합하다는 이유로 다시 국가에 환속되었다.

 

출토 유물들

 

임란 직후에는 <경상감영 터>로 일시적으로 이용되다가 정유재란 때 왜군이 달성 내 감영을 완전히 불태워버려 그 이후로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출토 유물들

 

1894년 청일전쟁 때 동학란 진압을 빌미로 출병한 일본군이 달성토성을 그네들의 진지로 사용했고,

 

출토 유물들

 

1906년에는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 1,500여 명이 달성 안에 일본인 신사, 즉 <황대신궁 요배전>을 건립했다.

 

출토 유물들

 

1965년 정부로부터 관리권을 인수받아 대구시가 이듬해 8월에 성 안에 가득 차 있던 쓰레기들을 모두 제거한 후 공원을 만들게 되면서

 

출토 유물들

 

각종 동식물과 조류, 그리고 온갖 역사 기념 조형물들이 뒤범벅이 돼 있는 오늘날의 달성공원에 이른다.

 

성벽 발굴과 출토 유물들

 

<중략>,... 

<서침나무>가 달성공원 안에서도 거의 중심부에 위치해 매화 꽃술처럼 보이는 것은 좋지만 성전암의 <성철스님나무>가 비바람에 쓰러져 현재 밑둥치가 베어진 뒤 사라진 상황이고 보면,

 

고려사.고려사절요

 

달성공원 입구 도로(속칭 어가길) 위에 세워진 순종 임금의 동상처럼 그 땅의 원주인이었던 <구계공>의 동상도 마땅히 달성공원 안팎 그 어디쯤에 반드시 세워놓아야 할 듯하다.

 

출토 유물들

 

순종과 달성 터의 인연은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1월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전 - 대구 - 부산 -마산으로 이어진 남순행 길에 잠시 들렀던 게 고작이다.

 

실록

 

그때 대구역에서 달성에 들러 신사를 참배하고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기념식수를 했다는 기록이 1930년 기와이 아사오가 쓴 "대구이야기"에 전한다.

 

읍지, 읍사례

 

이 기록 때문에 달성공원 안에 두 그루의 가이즈카향나무가 말썽이다.

 

백자류

 

사람들은 현재의 향나무가 1909년에 심어진 나무라느니 아니라느니 하면서 말싸움을 하며,

 

대구 지도

 

심지어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그 나무들을 뽑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낙재선생문집, 우락재실기

 

나는 그 향나무 두 그루가 순종과 이토가 직접 심은 나무인지 아닌 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전시 유물들

 

이미 "대구이야기" 원전에 "당일 달성공원에 행차하여 폐하께서 친히 기념수를 심으시고 이토 공의 기념식수가 있었지만, 오늘날 그 흔적을 찾아볼 길이 없다'는 문장이 있기도 하거니와,

 

마패와 호패

 

설령 원래 심었던 나무가 말라 죽고 이후 1930 ~ 1945년 사이 언제쯤 그 자리에 현재의 묘목을 재식수해 놓았다 하더라도

 

상선인듯

 

그 두 그루의 향나무가 상징하는 바가 1909년의 향나무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 국채보상연합회의소규칙

 

성 터 안에 있었던 신사 건물이 사라진 지금 오히려 그 향나무를 일제의 달구벌 명당 침략의 한 증표로 남겨두고,

 

국채보상운동 회문

 

그 옆에 세워져 있는 항일 민족시인의 시비나 애국지사 기념비와 대비시키며 후손들의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는게 더 지혜롭지 않겠는가.

 

낙동강 전투 상황도

 

일제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던 순종의 그 치욕스런 달성 방문과 원래의 식수가 바뀌게 된 경위를 관광안내판에 게시해 놓아야 함은 물론이다.

 

1913년 대구 달성토성 사진

 

달성 터의 장소혼은 우리들에게 말한다. *참고 [서침 : 본관은 달성, 자는 성묵, 호는 구계]

 

경상 감사 도임 순력 행차도

 

알토란 같은 삶 터를 나라에 내놓는 대신 대구부민의 고단한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향토애를 발휘한 구계공을

 

달성공원 앞 도로에 세워진 황제지보 - 국새

 

'대구의 정신'을 상징하는 한 인물로 선정해 그의 동상을 세워 그를 달성 터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학실하게 자리매김해 놓으라고,

 

순종황제상

 

또한 그 방법만이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는 않는다'는 잠언 그대로 매화형국 달성 터의 햐기로운 명당혼이 가이즈카향나무의 고약스런 역사향을 압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달성 앞 도로 위의 순종황제 상

 

설령 그런 장소정신적 깨달음이 업사고 하더라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듯한 현재와 같은 주객전도의 달성 터 일대의 경관 모양새를 이대로 계속 방치해 두는 것은 문화시민으로서의 도리가 아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