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고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에 있다. 여행을 하면서 이러한 곳을 방문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여행은 나에게 있어 늘 새로움의 발견,....이라는 생각을 자주 해 본다.
이 곳을 관람하면서 특별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천황이 있는 곳을 향해 사람들이 인사를 하는 모습'이라는 사진이다. 나라를 빼앗겨 36년. 얼마나 많은 것을 착취하고 약탈하였을까?
겨울이 지나면 분명 봄을 올 것이지만, 이상화 시인은 사진 속의 풍경처럼 암울함을 노래했을 거다. 안내문의 내용과 고택 마당에 새겨 놓은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옮겨 본다.
오늘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를 되뇌이면서
[이상화 : 1901~1943]
이상화는 아름다운 서정적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식민지 시대에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운 192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저항시인이다.
1920년대 우리 시의 경향은 낭만주의, 상징주의, 퇴폐주의 등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문예사조들이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상화는 그러한 문예사조들을 과감히 탈피하고 민족의 현실로 눈을 돌려 민족의 아픔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빼어난 저항시들을 남겼다.
이상화는 1901년 5월 9일(음력 4월 5일) 현재의 대구시 중구 서문로2가 12번지에서 부친 이시우와 모친 김신자 사이의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상화의 집안은 당시 대구의 명문가로, 그가 7살 때 부친 이시우의 사망으로 백부 이일우의 가정 사숙에서 교육을 받다가 15살 때 경성중앙학교에 입학했다.
백부 이일우는 당시 3천석지기인 민족 자본가였으며, [우현서루]를 운영하며 서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여 민족지사를 양성했다.
가까운 친구로는 박태원, 현진건, 오상순 등이 있고 그 외에도 백조 동인과 교남학교의 친구들이 있다.
이들 중 백기만은 1917년 대구에서 동인지<거화>를 함께 출간했고, 3.1운동 때 대구에서 이상화와 더불어 학생 봉기에 앞장섰던 인물로 백기만은 대구 고보의 연락책을 맡고 이상화는 계성학교의 책임을 맡으며 3.1운동의 민족 봉기에 앞장섰다.
이상화는 1922년 <백조>동인이 되어 [말세의 희탄], [나의 침실로]와 같은 낭만적 서정시를 발표했으며, 1922년 프랑스 유학을 꿈꾸며 도쿄로 건너가 프랑스어를 공부하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을 겪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조국으로 귀국한다.
이후 그의 시는 현실로 눈을 돌려 [가장 비통한 기욕], [가상], [조선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등을 [개벽]에 발표하였다. 1925년과 1926년은 상화의 작품 활동 절정기로, 작품의 3분의 2를 발표한다.
이 두 해는 이상화의 창작 열정이 분출한 해이기도 하지만 관동대지진의 쓰라린 체험 뒤의 귀국과 거기서 받은 민족적 상처와 울분, 국내 각지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노동자들의 파업, 우리 민족의 간도, 만주이민의 참상이 작품에 스며들어 있다.
이 중, 1926년에 <개벽 70호>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작가의 반일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나라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식민지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주된 흐름으로 하고 있다.
1927년 이후 이상화는 <이종암사건>,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했었고, 이후로도 일본인들의 감시와 가택수사 등의 탄압을 받게 되었으며, 1937년 3월에는 독립투사인 형 이상정장군을 만나러 만경에 3개월간 갔다 와서 일본 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교남학교를 그만둔 뒤 <춘향전>의 영역본과 국문학사 등을 기획하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1943년 4월 25일 위암으로 불꽃같은 시인의 삶을 마감했다.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널리 알리고자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대구시 중구 계산동 2가 84번지 이상화 고택을 2002년 대구 시민의 힘으로 지켜내 2008년 8월 12일 개관하게 되었다.
시민이 숙원사업으로 이루어진 이상화 고택은 역사적인 장소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시 [더러운 해조]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에는1948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시비 [나의 침실로]가 있으며, 대구 두류공원에는 1996년에 이상화 동상과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세워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에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쁜하게나 자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은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좌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는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루픈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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