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림길 73에 <송림사>가 있다. 평지에 위치하면서 규모도 제법 클 뿐만 아니라, 품고 있는 문화재도 여럿 있다. 굳이 이 사찰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문화재를 소개하는 글 속에 충분히 담겨져 있지 않을까 싶다. 계절마다 전각들과 어우러진 풍경이 정말 아름답겠다.
[송림사 대웅전]
<송림사 대웅전>은 단층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로 5칸이란 정면 칸수는 현존하는 조선후기 불전 가운데서 흔치 않은 사례에 속한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전 불전, 특히 주불전은 중층구조를 취하거나 정면 3칸 이상의 간살이 주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한 피해를 입은 뒤 17세기 이후에 들어서 재건하게 되지만 이전의 규모를 회복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찰의 전각이 지속적으로 축소되는 경향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전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고 시각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제 역할을 하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 전각이 유형화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런 추세 속에서 5칸 규모로 주불전을 재건한 송림사 대웅전은 그 규모만으로도 3칸 불전이 주류인 다른 사찰과 차별되는 가치로 인정된다.
조선후기에 건립한 5칸 불전은 사례가 많지 않고 현재 대부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보호받고 있는 현실도 고려될 배경으로 판단된다.
송림사 대웅전은 1649년에 재건하면서 평면 구성에 있어서 동시기에 재건된 불전과는 불단과 후불벽 위치, 간살 구성에서 고식 특색을 견지한 점이 두드러진다.
불단이 대웅전 중앙에 있으며, 규모는 거대한 편으로 크기는 가로 13m, 세로 2.24m, 높이 1.03m 이며, 전면에는 화려한 부조 조각을 새겼다.
중앙 세 칸에 불단이 점유함으로써 사실 5칸 불전이지만 송림사 대웅전의 실내 예불공간은 일반 불전에 비해 넓다고 보기 힘든 결과가 되었다.
실내에서 의례를 거행하게 되면서 실내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고 자연스레 고주열을 뒤로 물려(이주법) 불상 전면의 예불공간을 확장시키는 방식으로 변화한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었으나,
송림사 대웅전은 배면쪽 고주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가로 폭은 세 칸 너비에 맞춰 불단을 배치함으로써 실내 중앙부를 점유한 평면구조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주칸 설정은 만복사지 서금당, 무량사 극락전 등의 건물에서 보이는 고식기법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송림사 대웅전의 공포는 살미에 쇠서가 없는 형태로 교두형 공포로 분류된다. 이런 유형의 공포 양식은 비교적 시기가 올라가는 편으로 조선후기에는 널리 쓰인 방식은 아니다.
이 시기에 교두형 공포를 채택한 건물은 송림사가 자리한 팔공산 일대에 교두형 공포를 쓴 건물들이 집중 건립된 점은 하나의 특색으로 판단되는데, 그 근간에 승장 각원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기술과 기법을 계승한 승장들이 이들 지역의 건물을 지었다는 분석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공포 외에도 이들이 지은 건물은 구조면에서도 영향 관계를 확인할 수 있어 향후 심도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구 부재를 지속하여 사용한 1850년대 중수공사인데, 상량문의 내용과 재사용한 부재로 보면 이 시기 공사는 여러 부분에서 이전 대웅전과는 건축의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 재목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대웅전의 부재 즉 옛 재목을 이용하여 공사를 마무리 하였는데 이때 수리를 거치면서 지붕형식이 팔작지붕에서 맞배집으로 개조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850년 중수공사는 신 자재를 구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출발한 중수공사였고 구부재를 적극 사용하면서 건축형태의 변모라는 결과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조선후기 주불전에서도 이런 실상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나 송림사 대웅전은 건축부재의 흔적과 상량문이란 기록이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록 없이 부재만으로 추정하는 다른 불전과 차별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송림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5층 전탑은 흙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해 쌓아 올린 탑으로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탑을 받치는 기단은 벽돌이 아닌 화강암을 이용하여 1단으로 마련하였는데, 기단의 4면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은 모두 벽돌로 쌓아 올렸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높이가 거의 줄어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나, 각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이 넓은 편이어서 안정되고 온화하다.
지붕은 벽돌로 쌓은 점을 고려한 듯 밑면의 받침부분 외에 위의 경사면까지 층급을 두어 쌓았다.
꼭대기에는 금동으로 만든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이는 1959년에 해체하여 복원작업을 하면서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다. 비록 모조품이긴 하나, 통일신라시대 금동 상륜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며, 보수를 하면서 탑신의 몸돌 내부에서 나무로 만든 불상과 사리장치 등이 발견되었다.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
송림사는 진흥왕 5년(544) 명관이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절로, 여기에는 우리 나라에 몇 개 밖에 남아 있지 않은 벽돌로 만든 송림사 오층전탑(보물)이 있다.
1959년 이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면서 탑 안에 있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는 2층 탑신 구형 석함 속에서 발견되었다.
1층 탑신에서는 나무와 돌 그리고 동으로 만든 불상이 각각 2구씩 나왔고, 2층에서는 신라의 사리장엄구들이 나왔다. 얇은 금판을 오려 만든 섬세한 장식물들이 붙어있는 금동제 사리외함과 녹색 유리로 만든 목이 긴 사리병, 옥과 진주가 붙어있는 유리잔들이 채색된 거북 모양의 석함 안에 있었다.
3층에서는 나무 뚜껑이 덮혀있는 돌 상자 안에서 부식된 종이들이 발견되었으며, 5층 위에 있는 머리 장식부인 복발(엎어놓은 대접모양의 장식) 안에서는 상감청자로 만든 원형 합과 금동으로 만든 원륜 2개가 발견되었다.
그 중 상감청자 원형합은 국화 꽃무늬와 덩굴무늬로 장식한 것으로, 유약 색깔과 문양으로 보아 고려 12세기 후반 상감청자의 전성기 때 작품으로 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 밖에도 구슬 281개, 은 고리(은환) 15개, 향목 7개와 보리수 열매로 보이는 열매가 1개가 발견되었다.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다양한 유물들이 하나의 탑 안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보수가 여려 차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2층에서 발견된 거북 함 속의 금동 사리기와 유리 사리병은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유물로 사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송림사의 천불전에 봉안된 이 삼존상은 아미타여래와 관음.지장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형식이다. 이 삼존상은 '불석'이라고 불리는 돌로 제작되었다.
불석은 경주지역에서 채석되는 연질의 석재로서 목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조각승들도 비교적 쉽게 다룰 수 있는 재료였다고 생각된다. 상들의 표현은 재질에서 기인한 탓인지 얼굴이나 신체의 표현에서 다소 딱딱한 느낌을 준다.
이 삼존상에서 특기할 만한 표현은 수인의 형태로 삼존 모두 두 손을 다 같이 손바닥을 밑으로 하고 두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러한 수인은 조선후기 불석제 불상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특히 이상은 이러한 수인을 취한 불석제 불상 중에서 선구적인 예에 속하는 것으로 조각사적 의의가 있다.
한편 아미타여래상의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을 통해 1655(효종 6) 무염유파의 조각승 도우가 현재까지 밝혀진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수화원이 되어 조성한 작품으로 17세기 불교조각사 및 조각유파 연구에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칠곡 송림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송림사 대웅전 수미단 위에 봉안된 이 삼존상은 석가여래와 문수.보현보살로 구성된 석가삼존형식으로 본존불(277cm)의 높이가 3m에 육박하는 거대한 목조불상이다.
이 삼존상은 규모가 큰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신체비례가 적당하고 안정적이며, 당당한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다.
본존 석가모니불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무릎 위로 올려 구부린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본존과 거의 흡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좌.우협시보살상은 양손의 수인의 위치만 달리하여 두 손으로 긴 연꽃줄기를 잡고 있는데, 연꽃줄기는 보관과 함께 후대에 보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림사 삼존상은 양식적으로 건장하고 당당한 형태미, 엄숙한 얼굴표정에 입가를 눌러 만들어 낸 생경한 미소, 간략하고 단순화하지만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옷주름 등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양대전란 이후 17세기 전.중엽경의 재건불사 과정에서 제작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상통한다.
이 삼존상은 조선후기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대작으로서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을 통하여 정확한 조성연대와 발원자, 조각승을 알 수 있다.
특히 17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조각승 무염계에 속하는 수화원 도우를 비롯하여 18명의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대형작품이다.
따라서 이 삼존상은 17세기 전반과 후반을 잇는 기념비적 작품이자 조각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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