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 두번째 이야기.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 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강의 남안에 있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이 동서로 나뉘어 붙어 있고, 다시 그 주위에 북동쪽의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산성을 동반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자루, 영일루(迎日樓), 반월루(半月樓), 고란사(皐蘭寺), 낙화암(落花巖), 사방의 문지(門址),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사비성, 소부리성(所扶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 도성의 일환이며,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의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 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대대적인 개수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부의 성벽은 통일 신라 시기에 수축되고,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고을의 규모에 맞도록 축소되어 이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성내 벽쪽에 호(壕)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성벽의 축조에 판축의 재료로 이용하였다. 바깥 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을 세우고, 성벽의 안쪽과 중간에도 기둥을 세워 분할 축조되었다. 기단에는 낮게 석축을 하거나, 기단 석렬을 마련하고, 안쪽으로 배수로 겸 통행이 가능한 좁은 부석(敷石)의 시설도 있다.
성벽에는 가로 세로로 목재를 넣은 것도 있다. 후대의 것은 무너진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기도 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版築)하듯이 황색 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 놓았다.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 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수축, 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것이긴 하나, 년차적인 조사에 의하여 성벽과 치성 및 특수한 시설과 내부의 여러 가지 양상이 차례로 밝혀져, 우리나라 고대 축성 기술의 박람회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를 중심하여 조사된 구간에서는 다양한 집터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성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北門)과 수구(水口)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宮女祠 가는 길]
반월루에서 사자루 가는 방면의 언덕을 내려가면 기념품과 토속음식을 판매하는 가게가 몇 나온다. 그 곳에서 우측으로 다시 약 300미터 가량 내려가면 '궁여사'이다.
백제 의자와 20년(660)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삼천궁녀들은 적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낙화암에서 꽃처럼 떨어졌다. 이러한 삼천궁녀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세운 사당이다.
[사당의 정문]
[궁여사 전경]
[사당 전경 : 내부에 궁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낙화암(落花岩) - 백화정(百花亭)]
낙화암은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위치한 문화재자료 제110호 이다.
백제의 700여년의 왕조가 무너지던 날 의자왕의 궁녀들이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이 곳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원혼을 묻었다고 전하는 곳이다. 낙화암이라 이름지어진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 당시 궁녀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는 것에 비유해서 이름 붙인 것이다. 암벽에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이라고 조각된 글자가 있다. 1929년에는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낙화암 바위의 꼭대기에 육각형의 백화정을 건립하였다.
[낙화암 천년송 시]
백화정의 뒷쪽으로 가파른 절벽이 백마강을 내려다 보고 있다. 무심히 흐르는 백마강과 건너편의 넓은 들녘만이 궁녀들의 마음을 알고 있으려나,... 정자의 앞 쪽에는 백마강과 함께 천년을 지켜왔을 천년송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낙화암에서 되돌아오면서 좌측 방면으로 '고란사' 가는 길이다. 다소 가파르지만 꾸준하게 계단으로 이어져 있어 큰 어려움이 없겠다. 제법 단풍이 절정에 이르면 경치 또한 장관을 이루겠다.
[낙화암에서 고란사로 가는 길에 내려다 본 절의 풍경]
'고란사'는 낙화암의 바로 아래 위치하고 있다. 거리가 가까워 절의 절벽이 낙화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아마도 궁녀들의 원혼을 고란사에서 달래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절의 마당에 관람객과 불자들이 많이도 모여 있다.
고란사는 문화재자료 제98호 이다.
부소산 북쪽기슭의 백마강 좌안(左岸)에 자리한 고란사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법당과 요사(窯舍)의 건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사찰이다. 이 사찰은 불적(佛跡)보다는 고란초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법당 뒤편에서 나오는 약수와 함께 이 사찰의 명물을 이루고 있다.
고란사는 백제멸망과 관련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하나 정확한 유적이나 유물은 없고, 현재의 고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는데 현 사찰건물(寺刹建物)은 은산(恩山) 승각사(乘角寺)를 이건(移建)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고란사(皐蘭寺)의 전경]
마당의 끝에 아담한 종각이 있다. 그 뒷쪽으로 돌아가면 샘물과 고란초가 있다고 하나 진작 그 것을 보지는 못하고 되돌아 와 아쉬움이 컸다.
[고란사 주변 풍경]
고란사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아주 먼 옛날 소부리라는 마을에 금슬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늙도록 자식이 없어 노 부부는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가능한 한 회춘하여 자식을 갖기를 소원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의 꿈에 산신령으로부터 부소산의 강가 고란사의 바위틈에서 자라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효험이 있으니 그 것을 마시라는 말을 듣고 이튿날 새벽 부인은 남편을 보내 그 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그러나 한나절이 지나고 밤이 되어도 남편이 돌아오지를 않자 다음날 아침 부인은 서둘러 남편을 찾아 약수터로 향했다.
아무리 찾아도 남편은 보이지 않고 웬 간난 아이가 남편의 옷을 입고 누워있어 부인은 깜짝놀랐고, 이내 남편에게 꿈의 내용을 사실대로 알려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유인즉 부인의 꿈에 산신령이 말하기를 "고란초의 이슬이 젖은 약수를 마실때 한 잔 마시면 3년이 젊어지고 두 잔을 마시면 6년이 젊어지는 즉. 한 잔에 3년씩 젊어진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인은 할 수 없이 갓난 아이를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키웠는데 이 아이가 먼 훗날 백제의 최고 벼슬인 좌평의 벼슬에 올랐다는 전설이다.
[단풍으로 물드는 고란사]
[낙화암 풍경]
고란사 바로 아래에 선착장이 있다. 고란사까지 와서 역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얘들에게 다소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아이들의 어두워질 안색을 생각하다 아이들과 집사람은 유람선으로 이동하도록 하구 열심히 달려서 사비문 앞 주차까지 열심히 걸었다. 이럴때에는 자동차도 불편하다는 생각.
헤 ㅋ 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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