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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마치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것 같다, 두무진

by 포리시스 2026. 7. 18.

[ 마치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것 같다, 두무진 ]

 

우리나라 해금강의 백미!,... 두무진 관람기이다. 이 곳은 조선 광해군 때 <이대기>라는 분이 선대바위를 보고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극찬했다고 한 것처럼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두무진 포구

 

선착장에서 유람선 백령호에 탑승했다. 다부진 모습의 해병대 복장을 하신 멋진 여선장님. 절경의 곳곳에 붙여진 이름과 더불어 이야기를 많이 해 주신 것 같은데, 아름다운 모습에 취해 정작 ‘코끼리바위’와 ‘부처바위’만 생각난다.

 

왼쪽 정상 전망대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바위에 올라 일광욕을 즐기고 있을 천연기념물 ‘점박이물범’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지만, 검은 바닷빛과 구별이 쉽지 않은 곳에서 한참만에 겨우 머리만 빼꼼하니 보여주었던 녀석들의 모습이 아쉬웠다.

 

 

마치 장군들이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는 것 같다고 해서 ‘두무진’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아름답고 기묘한 암석들이 펼쳐져 있어 서해의 해금강이라 불린단다.

 

 

뾰족한 바위들이 많아 생긴 모양이 마치 머리털 같다고 하여 ‘두모진’이라고 부르다가 후에 장군머리 같은 형상이라 하여 ‘두무진’으로 개칭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단다.

 

 

붉은 저녘 노을을 머금은 풍경이 참 아름답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언제난 또 올수있을까 싶다. 이 곳 풍광을 극찬하였던 역사 속의 인물 이대기라는 분에 대한 묘갈명을 옮겨 보았다.

 

 

[ 이대기의 묘갈명(墓碣銘) - 저자 정온(鄭蘊) ]

내가 공의 얼굴을 알고 지낸 것은 대체로 오래인데, 생각해 보니 일찍이 한 자리에서 절차탁마(切磋琢磨)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됨을 깊이 알지는 못하였다.

 

 

만력(萬曆) 무신년(1608년 선조 41)에 함께 국광(국가의 예악문물)을 보기 위해 먼저 경저에 이르렀는데 마침 환난(患難)을 만나 장차 일망타진(一網打盡) 당하게 되어 많은 선비들이 두려워하며 그 지키던 바를 잃지 않은 자가 드물었는데 공만은 시종 꿈쩍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나는 그 진중(鎭重)한 도량에 감복하였다.

 

 

그 7년 후인 갑인년(1614년, 광해군 6)에 내가 언사(言事)로 죄를 입고 구속되어 감옥에 갇힌 지 5개월이 되자 당시 사라들이 모두 죽이고자 하였는데,

 

 

공만은 주선해서 보호해 주기를 마치 물에 빠진 자를 건져 주고 불에 탄 자를 꺼내 주듯 하므로 나는 거기에서 급한 난리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은 공의 지조 때문에 내가 다행히 죽지 않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옛날 탐라국(耽羅國) 대정현에 위리안치(圍離安置) 되었다. 그 7년 후 경신년(1620년, 광해군 12)에 공이 문경호(文景虎) 공의 억울함을 펴게 하려고 한 도내에 통문을 돌리다가 모함하는 자에 의해 해서 백령도로 유배되었으니, 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은 매양 같은 때에 환난을 만나는지 모르겠다.

 

 

공은 백령도에 있을 때 ‘백령지(白翎誌)’란 한편의 글을 나에게 보내 주었는데 그 글에는 본도의 풍토가 매우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털끝만큼도 근심하거나 액운을 탓하는 뜻이 문자 사이에 나타나지 않아 나는 여기에서 더욱 공의 지키는 바가 과연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다.

 

 

천계 계해년(1623년, 광해군 15)에 금상(인조)이 반정하여 나와 공은 함께 은사를 입게 되었다.

 

 

나는 사간으로 소명을 받고 나아가고, 공은 간성군수가 되어 들어와 숙배하고는 여사에서 만나 상대해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오래지 않아 나는 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공 역시 남의 모함을 받고 부임하지 않아 구빼를 나란히 하고 남쪽으로 왔다.

 

 

그 7년 후 공이 서거하였고, 또 7년 후에 공의 외손 성창계(成昌季)군이 그 무덤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불후의 명을 청하는데, 아! 내가 어찌 차마 공의 명을 짓겠는가?

 

 

공의 성은 이씨이고, 휘는 대기(大期), 자는 임중(任重)이니, 그 선대는 전의(全義) 사람이다. 고려 태사 이도(李棹)의 후손으로 그 13세 후손에 이순전(李純全)이 있으니 동지중추부사로 공의 5대조이다.

 

 

증조 이창윤은 장령이고, 할아버지 이공보는 현감이며, 아버지 이득분은 벼슬하지 않았는데 정(正)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신해년(1551년, 명종 6) 2월 3일에 공을 출생하였다.

 

 

공은 나이 16,7세에 문리가 크게 통하여 수우 최영경 공에게 취학하고 인하여 남명 조식 선생 문하에 출입하였으니, 대대로 선생과 황강이 도의로 사귄 친구였기 때문에 자기 손자처럼 보아 때때로 특별히 교도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 유가의 성리학은 단지 과거 시험 공부를 위할 뿐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경오년(1570년, 선조 3)에 내간상을 당했는데 이때 공의 나이 약관이었으나 집상의 예에 어김이 없었다. 신묘년(1591년, 선조 24)에 여묘를 살다가 외간상을 당했다.

 

 

이듬해에 왜적이 침입해 와 연달아 삼경이 함락되어 임금은 관서 지방으로 파천하여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공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백성은 아버지. 스승. 임금을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 지금 나라가 위태롭고 이금이 급박하니, 상례로 처신해서는 안 된다.”하고는,

 

 

연제를 지내고 향병을 모집하여 곽재우 등 제공과 함께 서로 성원하며 낙동강의 위 아래를 막으니, 왕래하던 적선이 꺼려하며 감히 함부로 날뛰지 못하였는데 낙동강 오른쪽 약간의 군현이 거기에 힘입어 완전히 보전되고 후일 중흥하는 기반이 되었으니, 공의 힘 역시 있었던 것이다.

 

 

선조가 의주에 주필하여 본도에서 창의한 사람의 일을 듣고 열 줄의 교서를 내려 포장하고 인하여 차등을 두어 벼슬을 내렸는데 공에게는 장원서 별제를 제수하였다.

 

 

계사년(1593년, 선조 26)에 감사가 공에게 목민할 재능이 있음을 알고 임시로 지례현을 맡게 했는데 비록 유리하는 중이었지만 그 직책을 잘 수행하여 고을 사람들이 모두 정식 수령이 되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갑오년(1594년, 선조 27)에 황산도 찰방이 되고, 이듬해인 을미년(1959년, 선조 28)에 의흥 현감으로 승진하여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기해년(1599년, 선조 32)에 내직으로 들어가 형조 좌랑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경자년(1600년, 선조 33)에 영덕 현령이 되었다가 무신년(1608년, 선조 41)에는 청풍 군수가 되었고, 계축년(1613년, 광해군 5)에 임기가 차서 공향으로 돌아왔다.

 

 

10월에 제용감 판관에 제수되고 갑인년(1614년, 광해군 6) 정월에 사도시첨정으로 제배되었다가 얼마 후 외직으로 나가 함양 군수가 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어떤 일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갔다.

 

 

공은 의리를 지키는 데 용감하였고, 벗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억울함을 당하면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급하게 여겨 구하지 못할까 염려하다가 마침내 이로써 죄를 입어 백령도로 귀양을 갔으니, 이때 나이가 이미 70세였다.

 

 

절해고도( 絶海孤島)에서 귀매를 막아내는 일은 아른 사람이라면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말이나 얼굴에 그런 기미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위리 안치되어 있던 4년 동안에 수염과 머리털이 전보다 더 좋아졌다.

 

 

방환(放還)되어 은제가 내리자마자 어떤 사람이 또 가로막아 이때부터 강가의 집으로 돌아와 누워 오랫동안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았다.

 

 

무진년(1628년, 인조 6) 11월 14일에 병환으로 정침에서 고종하니, 나이 78세였다. 이듬해 정월 5일에 초계 소재지 동쪽 부곡의 유좌 묘향(酉坐卯向)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증 참의 진주 강심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5녀를 낳았으나 아들은 모두 일찍 죽고, 측실 소생 아들 이뇌가 있다.

 

 

큰딸은 정승선에게, 다음은 참봉 이곡에게, 다음은 성이침에게, 다음은 현감 신득자에게, 다음은 생원 이도에게 각각 시집갔다.(중략)

 

 

공은 신체가 헐걸차고 수렴이 길고 성품이 개결하여 허영하는 사람이 적었다. 젊어서부터 문장을 잘하여 이름을 울렸고 또 시를 잘하여 향시에서 높은 등수를 차지하였으나 마침내 회시에 합격하지 못하였으며,

 

 

자녀가 모두 요절하여 집안을 단지 한 서자가 전하게 되었으니. 하늘이 선인에게 한 보답이 어찌 이리도 한결같이 인색한가? ‘백령지’와 ‘허와기’ 등 약간 편과 <설학수문> 1권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일찍부터 명문가에서 배우고 연원이 있었기에 학문이 발랐고, 형제들과 우애하며 개제한 성품 보존하여 행동으로 시행하였네. 위태로움에 처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궁함에 처하여 고민하지 않았으니 그 성품이 그러하였네.

 

 

친구의 어려움 급하게 여겨 길게 탄식할 뿐만 아니었으니 어찌 그리 굳세였던가? 재능이 있었으나 시험해 보지 못하여 큰 그릇이 끝내 숨겨졌으니 그 운명 애석하게 여길 만하네.

 

 

낭서의 관직과 군현에서 시행한 것 어찌 성대하다 하겠는가? 청계의 동쪽 부곡 가운데다 영원한 유택을 정하였네. 내가 그 행적 뽑아서 비석에 새기니 후세의 경사이내.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