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수군통제영>은 1604년에 설치되어 1895년에 폐영될 때까지 전라.충청.경상의 3도 수군을 지휘하던 본부였다.
세병관의 외삼문 - 망일루
임진왜란 때 제1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한산도에 설치했던 본부가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삼도대중군어문 - 통제사의 참모가 업무를 보던 곳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떠난 정유재란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져 지금의 통영시 두룡포에 자리를 정했다.
망일루의 계단
1604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부임한 뒤, 제209대 통제사 홍남주(洪南周)까지, 무려 290년간 왜적에 대비하는 조선수군의 총본부로서 오늘날의 해군사령부와 같은 곳이었다.
망일루(望日樓) : 세병문(洗兵門)이라고도 한다. 광해군 3년(1611) 제10대 통제사 우치적 재임기에 세웠으며, 영조 45년(1769) 화재로 소실된 것을 제128대 통제사 이국현이 다시 세웠다. 통행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커다란 종이 설치되어 있었다. 2000년에 중건하였다.(네이버)
1998년 2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사라진 건물들에 대한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운주당, 백화당, 병고, 중영청, 산성청, 12공방 등의 건물들을 복원하였다.(안내문)
좌청(左廳) : 군관과 사병이 대기하던 건물로 대변좌청(待變左廳)이라고도 하며, 제54대 신여철(申汝哲) 통제사가 1689년에 좌청과 우청으로 분청(分廳)했다고 한다.(안내문)
이 곳의 중심건물 세병관은 경복궁의 경회루가 2층의 누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세병관의 건물 규모가 웅장하여 사뭇 비교해 봄직하겠다.
산성청(山城廳) : 통영성(城)을 지키는 산성중군 등이 근무했던 곳으로, 숙종 44년(1718년) 제83대 오중주(吳重周) 통제사 때 건립하였으나 소실되었던 것을 발굴 유구와 문헌에 의하여 최근에 중건하였다.(안내문)
일제강점기에 많이 훼손되었던 객사의 건물들이 많이 복원되어 있고 현재까지도 발굴 모습이 보여지고 있다.
지과문(내삼문) 좌측 축대
아래의 내용은 통제영의 역사를 잘 설명하고 있어 이곳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 것 같아 네이버에서 옮겨왔다.
지과문(내삼문) 우측 축대
통제영의 영역이 제법 넓다. 동선은 통제사 참모의 영역 - 세병관 영역 - 통제사 업무 영역 - 뒤 정자를 들러 12공방 영역으로 둘러보았다. 담아온 사진이 많아 다소 지루 할 수도 있겠다.
좌청, 그 앞에 수항루, 좌로 비각
[ 통제영의 변천 ]
오랜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통제영의 성곽과 건물들은 고정된 모습이 아니라 시기에 따라 많은 변화를 거쳤다.
지과문에서 본 망일루
따라서 실제 복원을 할 경우 그 시기를 정하는 것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지과문(止戈門) : ‘창을 거두는 문’이라는 의미로 평화를 상징하는데, 이 글자를 하나로 모으면 ‘무(武)’가 된다. 즉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란다.
하지만, 디지털콘텐츠를 활용할 경우 그 시기를 쉽게 설정할 수 있고 또한 변천의 양상까지 다룰 수 있어서
세병관 앞 '수'자 기
역사.건축 교육용 영상뿐만 아니라 각 병영. 수영. 읍성 등의 전시관에서 영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석인(石人) : 숙종 27년(1701) 제77대 류성추(柳星樞) 통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 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최초의 통제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 의해 한산진(현 한산도, 1593~1603)에 설치되었으나
세병관
제2대 통제사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여 진영의 본거지인 한산진은 소실되었다.
석인
이후 선조 36년(1603)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통제영을 두룡포(현재의 통영)에 터를 닦고 설치하여
석인
고종 32년(1895)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질 때까지 292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서 유지되었다.
석인
이러한 통제영의 변천을 형성기, 성장기, 유지기, 폐영기를 거쳐 현재모습까지 구분하여 살펴본다.
석인
(형성기 : 1603~1638)
형성기는 통제영을 두룡포로 이전하는 선조 36년(1603)을 전후한 시기이다.
석인(石人) : 숙종 27년(1701) 제77대 류성추(柳星樞) 통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 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
전란 이후 피폐해진 각 지역의 복구로 통제영의 체제정비도 기본적인 체계만을 우선 마련하였고,
통제사비군(統制使碑群) :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東向)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을 말한다. 이 통제사비군은 통제사가 부임하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에 이 지방 군(軍). 관(官). 민(民)이 세운 일종의 송덕비인데, 표제(表題)도 송덕비(頌德碑). 추사비(追思碑). 거사비(去思碑). 사적비(事蹟碑). 불망비(不忘碑). 타루비(墮淚碑). 유애비(遺愛碑). 선정비(善政碑) 등으로 다양하다
다수의 외창을 조영하여 재정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세병관
제6대 이경준 통제사로부터 선조말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겨우 통제사의 거처와
운주당 방면에서 본 세병관
객사인 세병관, 백화당 등과 기본적인 병고. 군창. 공고 영고 등의 각종 창고들만이 마련되었다.
통제사 업무공간인 운주당 영역의 출입문
광해군대에 이르러서야 영리청과 내아, 사공청 등 일부 통제영의 하부구조가 이루어졌다.
운주당 정문 - 좌.우 비대칭의 지붕을 볼 수 있다. 좌측에 병고가 자리하여 지붕이 더 넓다.
그리고 각종 화포류를 담당하는 포수청과 주사화포청 등이 조영되어 가장 기본적인 물적구조를 갖추었다.
정문을 들어서며 본 운주당
한편 이시기에는 통제영 직할의 우후영의 모습도 가장 기본적인 반구정과 군관청이 본영 내에 마련되고,
통제사가 업무를 보던 운주당
거제와 접한 요충지인 견내량에는 우후가 풍화기에 나아가 지키는 방영이 인조 8년에 그 모습을 갖추었다.
병고
(성장기 : 1638~1720)
성장기에 이르러 통제영 건설은 삼도수군을 관할하는 위용에 걸맞게 건물들이 계속적으로 조성되었고
승자총통
성곽을 지어 완전히 정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인 인조 18년 서리청, 인조 28년 교련당, 운주당, 호가각 등 본영의 주요 기구들이 마련되었고,
효종대 등패청과 파취헌, 헌종 9년 고마창이 마련되었다.
헌종 14년 군뢰청, 삼랑창 등 많은 공해가 조영되었고,
숙종 1년 우후영에 집사청, 화포청, 사공청, 우후군뢰청 등 대대적으로 보충되었고,
숙종 3년에는 수항루가 세워졌다.
통영성은 숙종 4년을 전후한 시기에 통제사 윤천뢰에 의해 본격적으로 건립이 추전되었다.
성문과 누각을 짓고, 숙종 20년에 동.서.북쪽에 망루의 구실을 하는 포루를 세웠다.
그리고 숙종대에 선군직청, 어변군관좌우청, 영노청 등 통제영의 각종 관청이 정비.설립되었다.
사실상 통제영 건설이 마무리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유지기 :1720~1895)
유지기는 경종대에서 고종 32년까지로, 통제영이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일부 통제영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운주당 뒤로 득한당과 파취헌
낡은 건물들을 보수하거나 개건하였다.
운주당 집무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영조 16년 그 동안 방치되었던 한산도 제승당을 중건하고,
운주당 대청마루에 전시된 팔사품
보역창, 섬향고, 평무고 등 주로 통제영의 내창 등이 다수 건립되었다.
팔사품 - 귀도
통제영은 크게 통제사가 제반 의전을 치루던 객사인 <세병관 영역>과
팔사품 - 곡나발
내방하는 손님을 맞이하는 통제사 접견실인 <백화당 영역>,
팔사품
통제사 참모장들이 업무를 보며 기거하는 <중용 및 내아 영역>,
운주당(運籌堂) : 통제영의 내아(內衙)에 해당하며, ‘운주유악지’에서 나온 말로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이다. 인조 23년(1645) 제21대 통제사 이완 재임기에 세워졌다.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자리)
통제사가 업무를 보는 <운주당 영역>으로 크게 구분질 수가 있다.
팔사품 - 참도
백화당 영역 서쪽으로는 통제영 시대의 각종 수공업품들을 생산하였던 십이공방이 자리하고,
경무당과 내아의 신성문
그 하단에는 각관의 색리들이 수직하던 잉번청을 비롯한 교방, 노인청, 등패청, 군기청 등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경무당 -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청 자리
중영은 일제시대까지 군청 건물로 사용되었으며 내아는 중영을 중심으로 서측에 배치되었다.
경무당 내 기록전시물
망일루를 지나면 서측에는 산성청이 동측으로는 좌청이 자리하고 있다.
경무당 내 기록전시물
보석을 따라 분명루를 통과하면 영노청, 군뢰청, 영리청이 남향으로 배치하고 그 뒤로 운주당 영역에 접어들게 된다.
고지도 - 백화당 주변으로 12공방
삼문을 지나면 집무실인 운주당과 경무당, 후원으로 득한당, 파취헌, 육의정, 의두헌이 있으며, 경무당 옆 신성문을 통과하며 내아가 있다.
수조도 중앙에 있는 통제사의 좌선인 통영상선으로, 통제사를 상징하는 팔사품이 자리해 있다
이렇듯 통제영은 각 전각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정리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운주당의 내아
(폐영기 : 1895~1945)
폐영이후 통제영의 모습은 1916년 조선 총독부에서 발간한 ‘통영지도’에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내아 정문
이것은 축적이 1/10,000 지도로서 건축물, 석축, 도로, 고목나무 등이 모두 표현되고 있다.
당시 세병관은 통영면 대화정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병관을 중심으로 서측으로 백화당, 남측으로 중영, 동측으로 운주당이 배치되어 있다.
운주당의 내아
이 지도에서 표선된 석축과 도로는 현재와도 유사한 점이 많으며 특히 세병관 앞 석축과 진입계단은 현재와 동일하다.
경무당 뒤뜰 풍경
먼저 백화당 주변배치를 보면 백화당 뒤 석축과 공내헌, 심이공방 등이 배치되어 있고 그 건물들이 당시에는 소학교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운주당뒤 득한당과 파취헌
세병관 서측 아래에 고목나무가 있으며 그 밑에 있는 구조물이 잉번청 위치와 일치하고 있으며 중영아래 표현된 석축은 현재에도 있다.
운주당.경무당 뒤뜰 풍경
중영 좌측으로부터 구조물은 응수헌과 반구정으로 추측된다.
운주당.경무당 뒤뜰 풍경
세병관 동측을 보면 운주당을 비롯하여 병고, 경무당이 있고, 운주당 전명에 영리청, 영노청, 군뢰청이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운주당 뒤뜰 정자
영리청 건물은 현재 사찰(법륜사)로 사용하고 있으며,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된 아방, 부관청 등이 배치되어 있다.
득한당(아래) 파취헌(위)
(현재모습 : 1945~현재)
지금의 통제영 모습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의도적인 훼철과 해방이후
육의정
근대화에 따른 주택건립, 선창의 매립으로 인해 빠르게 훼손되었다.
의두헌
불행 중 다행으로 객사인 세병관이 현존하여 현재 이를 중심으로 망일루, 지과문 등이 복원되었다.
육의정 내에 걸린 시
또한 선창에 있었던 수항루를 망일루 옆에 복원하였고, 두룡포기사비를 이건하여 망일루 뒤편에 두었다.
의두헌
더불어 최근에 운주당, 경무당, 내아 등이 복원되었다.
육의정
통영시에서는 통제영 복원사업을 5단계로 추진하고 있다.
의두헌과 육의정
제1단계는 세병관 주변의 망일루, 지과문, 주변 협문 등을 옛 모습대로 복원,
세병관 뒤뜰 풍경
제2단계는 지원.지청자리에 운주당을 중심으로 경무당, 병고 및 삼문, 내아 등의 관아건물과 부속채를 복원,
12공방 영역
제3단계는 통영초등학교 일대에 백화당을 비롯하여 공내헌, 십이공방, 선자방 등을 복원,
백화당(좌)옆 공내헌(우) 주변 12공방 건물등
제4단계는 통영세무서 일대로 중영을 비롯하여 중영내아 산성청 등을 복원,
12공방과 멀리 서피랑(서포루)
제5단계는 기타 외곽지역을 복원할 예정이다.
세병관(좌)과 백화당(가운데)
현재까지는 제2단계가 완료되었고 제3단계가 진행중이다.(출처 : 네이버)
** 글의 작성시기와 비교하여 현재 제4단계까지 복원이 완료되었고, 5단계에 이른 것으로 확인이 된다.
12공방 뒤 우물터
[ 통영 세병관(統營 洗兵館) ]
통영 세병관(統營 洗兵館)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통영시에 있는 조선 시대의 객사이다.
12공방 건물 지붕너머로 세병관 건물이다.
‘세병(洗兵)’은 중국 당(唐)의 시인 두보(杜甫)의 시 세병행(洗兵行)의 마지막 구절인
세병관과 12공방 영역
“어찌 하면 장사(壯士)를 구하여 하늘의 은하수 끌어다가 / 갑옷과 병기 깨끗이 씻어 영원히 쓰지 않게 할는지”
12공방 풍경
(安得壯士挽天河 / 淨洗甲兵長不用)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국보 제305호로 지정되어 있다.
<<통영지>> 공해편에 의하면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두룡포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긴 이듬해인 선조 37년(1604) 완공한 것으로,
세병관과 우측 아래쪽의 잉번청 영역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 본영(本營)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충청, 경상, 전라)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공내헌
건물의 기단은 장대석 2벌대로 쌓아 비교적 낮은 편이며 기단 윗면에는 전돌을 깔았고 큼직큼직한 자연석 초석 위에는 민흘림 기둥을 세웠다.
공내헌 뒤 풍경
건물의 평면은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앞뒤에는 간살을 작게 잡은 퇴칸을 설치하였고 앞뒤에는 간살을 작게 잡은 퇴칸을 설치하였고
선자방
현재는 사방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원래는 평면의 기능에 따라 벽체가 설치되었던 것으로
공내헌과 정면 백화당
한때 통영초등학교로 사용되면서 건물내부에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내헌 현판
건물 내부에는 모두 우물마루가 깔려 있는데 후면 내진주열 중앙에 주변 우물마루 보다
백화당
약 45cm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고 그 위로 홍살을 세워 공간의 위계를 분리하였다.
공내헌
그리고 후면 내진주열 중방 하부에는 머름을 설치하여 분합문을 달고 중방위로는 판벽으로 마감하여
동개방 : 활과 화살을 함께 꽂아 넣어 등에 지는 가죽주머니인 동개와 활을 허리에 꽂는 궁대를 만들던 곳이다.
무인도(武人圖)를 그렸으며 천장은 소란반자를 설치하였다.
백화당
건물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모두 양성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용마루와 내림마루에는 용두가 올려져 있다.
백화당
건물의 뼈대를 구성하고 있는 가구(架構)는 2평주(平柱), 3고주(高株), 9량가(樑架)로
세병관 아래로 잉번청
전.후 처마기둥과 내진고주 사이에 퇴량이 걸쳐지고 대량은 전.후면 내진고주 위에 놓였다.
그리고 후면 내진고주 앞쪽으로는 또 한 줄의 내진주열을 매치하였는데
이 내진고주는 전.후면 내진고주 보다 포작의 높이만큼 높아져 기둥머리 위에서 간단한 보아지 형태로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백화당(百和堂) : 통제사의 집무실이다. 선조 36년(1603)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세병관과 함께 세웠다. 1775년 화재로 불탄 뒤 제132대 통제사 조완이 재건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됐다.
대들보 위로는 양쪽으로 간단한 형대의 포대공을 짜고 중종보를 올렸는데 이러한 수법은 중종보 위에서 종보를 받치는 수법과 동일하다.
백화당
종보 위로는 화려한 파련대공을 짜아 종도리를 받이고 있다.
세병관 전경
기둥위에 짜여진 공포는 익공계에 가까운 1, 2제공으로 포작을 구성하고 있는데
세병관 전경
외부에서만 행공첨차를 사용하였고 2제공의 뒷몸은 퇴량을 받게 하였다.
참차하부는 선각되어 있으며 세부적인 수법은 익공계 포작수법을 많이 따르고 있으며 각주 칸에는 화려한 화반이 놓여 있다.
향망궐배의 단
내부천장은 모두 연등천장으로 부재에는 모로단청 수법이 잘 남아 있다.
궐패를 모셨다는 단
(다만, 건물 내부의 중앙에 약 45cm 높이의 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곳은 부분적으로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다.
무신도
객사답게 수령을 비롯한 관원들이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무신도
대궐을 바라보며 절하는 향망궐배(向望闕拜)를 행하기 위해 마련해 놓은 것으로 여기에는 임금의 궐패(闕牌)가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무신도
세병관은 17세기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한국에서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하고,
무신도
이미 국보로 지정된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역사성과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므로 국가지정문화재 ‘국보’로 승격.지정되었다.
무신도
[ 우후영(虞候營) ]
우후(虞候)는 통제사 바로 아래의 정3품으로 통제영에서 최상위직 막료인 참모장이다.
단 위의 연등천장
우후를 중군(中軍)이라고도 불렀으며, 통제사 부재시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여 막중한 소임을 지고 있었다.
무신도
우후의 집무 및 기거 공간을 우후영 또는 중영이라 했다. 우후영은 군사 관계의 시설들로서 통제영의 직할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무신도
우후영은 성격상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하고 위계상 중간적인 위치에 있다.
자헌대부지삼군부사삼도통제사 제상국 막하
또한 수군으로서 선창에 있는 군선을 관리하므로 통제영외 다른 직제와 선창 수군과의 관계에도 중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의대부삼도통제사 유상국 막하
우후영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에 ‘삼도대중군아문(三道大中軍衙門)’이라고 적은 현판을 달았다.(안내문)
기삽석통(旗揷石桶) : 세병관 앞뜰에 영기와 장군기를 세우기 위해 깃대를 고정하는 커다란 두 개의 돌기둥으로 정조 10년(1786) 제142대 류진항(柳鎭恒) 통제사가 세웠다. 원래는 세병관 뜰앞 좌우 양편으로 2기가 있었으나, 현재 세병관 앞뜰 담장 부근에 서쪽 1기만 남아 있다.
[ 백화당(百和堂) ]
선조 36년(1603)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중국 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비장)청인데,
세병관 현판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의 염탐과 같은 업무도 맡았으며 지방장관이 임의로 임명하였다.(안내문)
내삼문 - 지과문
[ 12공방 ]
제반 군기와 진상품을 생산하였던 곳으로, 백화당 서쪽에 자리하며 군수품 생산과 민생에 필요한 물품은 물론 조정에 진공품과 때로는 중국 가는 사신의 헌상품까지도 조달하는 조직적인 분업의 군영 공방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수항루(受降樓) : 숙종 3년(1677) 제58대 통제사 윤천뢰 재임기에 임진왜란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매년 행하는 춘추군점 때 가왜장으로부터 항복을 받는 의식을 행하던 곳이었다. 통영성 남문 바깥에 위치하였으나 해안선 매립으로 선착장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려, 1987년에 이전 복원되었다.
임진왜란 초기 변방에서 각종 군수품을 자체 조달목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한산진에서 시작하였으나(1593) 임진란 이후 통제영이 창성하자 크게 번창하여 다양한 생활용품까지 생산했다.(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