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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경기 양주(3) - 회암사지

by 포리시스 2011. 12. 5.

   양주 회암사지(楊州 檜巖寺址)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번지에 위치한 절의 터로 사적 제 128호 이다. 두 번째 탐방이다. 언젠가 이 곳에 왔을때에는 안개비가 자욱하여 제대로 관람을 못 했다. 이후 맘 먹구 다시 함 찿았다. 이 곳에서 약 500여미터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서 천보산(423m) 아래 위치한 <회암사>두 볼겸,..

 

[전망대 안내문 - 회암사지 추정도]

 

   입구 율정슈퍼에서 약 300여미터 남짓 거리에 있다. 진입로 변에 가건물의 발굴전시장이 있지만,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다. 절터 역시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의 표식이 구간구간 세워져 있다.

 

[회암사지 이정표]

 

   정말 엄청난 규모의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을 거라 여겨질 만큼 넓은 대지이다. 충남 대천에 있는 <성주사지>의 규모가 크다고 생각했지만, 안내문의 기록과도 같이 전국 제일 이라 여겨진다. 절터에 남아 있는 건축물로는 윗 쪽의 사리탑과 아래의 당간지주 외에 큼직큼직한 석축물이 보이기는 하나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입구에서 본 회암사지]

 

   서쪽의 언덕에는 절터를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전망대가 시설되어 있다. 전망대 앞에 간이 안내소가 있어 이 곳에서 안내문을 볼 수 있다고 방을 붙여 놓았지만, 문을 닫은지 오래된 듯 보이고 빈 거치대만 썰렁하니 남아 있다. 그나마 회암사지에 관한 기록을 전망대 안내판에서 볼 수 있는데, 오래된 듯 많이도 낡아 있다.

 

[회암사지 전망대]

 

   얼추 저 아래에서 부터 윗 쪽으로 축대의 수를 헤아려 보니 10단 정도는 되어 보이는 듯 싶다. 대지의 윗 쪽으로는 어느 정도 정비가 되어 있어 다소 안정감이 있어 보이지만, 아래쪽으로는 보수 기간이 제법 걸릴 듯 싶다.

 

[회암사지 아래 단과 당간지주]

 

   다음은 전망대에 공개된 설명이다.

 

[회암사지 윗 부분과 부도]

 

   회암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지만, 고려 명종 4년(1174) 금나라 사신이 들렀다는 문헌기록이 남아있어 적어도 12세기 중엽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에서 태어나 고려와 원나라까지 불교의 심오함을 전파했던 고승 지공 영정]

 

   그러나 초기에는 현존하는 가람보다 소략한 규모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대규모의 가람은 이후 중창된 것이다.

 

[회암사 중창의 주인공인 나옹의 영정]

 

   회암사의 중창과 중흥의 배경에는 유명한 고승들과 왕실의 후원이 있었으니, 고려말에는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이 회암사를 주목했고 그의 제자 나옹(懶翁)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조선 건국과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무학대사의 영정]

 

   조선초에는 태조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학(無學)이 회암사의 지주로 재임하였으며, 이성계 본인도 태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회암사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도 이곳에서 불도에 정진하였다.

 

[부도]

 

   이런 까닭에 숭유억불(숭유억불)이 조선의 건국이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암사는 왕실의 비호 아래 조선 최대의 사찰로 그 위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복원.정비중인 윗 구역]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牧隱集』에는 당시 회암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3천여명의 승려가 머무르는 대사찰로 건물은 모두 262칸이며 높이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을 모셨다고 한다.

 

[중간 구역]

 

   건물들이 크고 웅장하고 아름답고 화려하기가 동국(東國) 제일이며, 중국에서도 이러한 사찰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아래 구역]

 

   이처럼 당당하였던 회암사의 위세는 문정왕후 사후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그러나 창건 기록과 마찬가지로 폐사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으며,

 

[석축물]

 

   관련문헌과 발굴 결과로 추정해 보았을 때 1566년부터 1595년 사이 유생들에 의해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 - 봉황문수막새]

 

   1997년부터 시행된 발굴 성과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궁궐 건축에서 주로 사용하였던 용봉 문양 막새, 청기와, 잡상 등이 출토되었으며, 왕실에서 사용하였던 광주 관요의 백자도 다수 출토되었다.

 

[입구의 계단]

 

   또한 8단지의 화계나 정청은 궁궐건축 양식과 유사하여 회암사가 조선초기 행궁으로서의 역할을 함께 하였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당간지주]

 

   400여년 동안 흙속에 묻혀있던 회암사는 양주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종합정비계획으로 조선 최대 국찰의 웅장한 위상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으며,

 

[천보산과 회암사지]

 

   정비사업이 완료되면 회암사에 대한 보다 많은 자료를 관람객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