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타사[壽陀寺]
강원 홍천구 동면 덕치리 21-1 번지에 위치한다. 한 시간 남짓되면 해는 서산으로 훌쩍 넘을거다. 부지런히 달리고 열심히 둘러 보아야 할 것 같다. 진작 둘러 볼 생각은 있었지만, 모처럼 아주 귀한 시간이 주어졌다.
이 곳에 와 보니 생각보다 절의 역사가 상당히 오래다. 산골짝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평탄한 지형에 앞으로 흐르는 내가 있어 신록이 우거지는 날이면 경관이 사뭇 아름다울거라는 생각이다. 또한 주변에 생태공원이 있어 가족들과 나들이 하며 사찰을 둘러 봄도 바람직하겠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가시지 않은지라 초록의 빛 보다는 호수가에 걸려 있는 차가운 얼음 탓인지 생태공원의 산책길이 춥기만 하다.
[사찰 입구에 세워진 하마비(?) 같다]
이 사찰에도 많은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다. 빛 바랜 흥회루의 단청과 내부에 있는 법고와 목어, 동종, 그리고 대적광전, 봉황문과 사천왕상, 전각에 보관중인 알수 없는 목판과 비록 보장각의 문이 잠겨있어 내부의 여러 보물들을 볼 수 없어 다소 아쉬움이 있었지만, 경내를 두루 돌아보면서 소중한 문화재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다리를 건너자 고목 아래 가지런한 마음의 석탑이,..]
사찰에 관한 연혁은 펌 했다.
수타사는 708(신라 성덕왕7)년 원효스님이 창건하여 우적산(牛跡山) 일월사(日月寺)라 지었다고 한다. 지금과는 산과 절 이름이 모두 다르다. 그러나 원효스님은 686년 입적하셨으므로 창건자와 연대중 한 가지가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창건 이후 영서지방의 명찰로 손꼽혀 왔던 수타사는 1568(선조2)년 현 위치로 이건하면서 공작산 수타사로 바뀌었다. 절 이름이 지금과 발음은 같지만 뜻이 조금 다르다.
[사찰의 정문 봉황문 앞에서]
수타사는 공작포란지형의 명당으로 동용공작.서치우적.남회비룡.북류용담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모두 불타버리고 40년 동안 페허로 남아 있었다.
1636(인조14)년 공잠(工岑)대사가 중창을 시작하여 법당을 다시 지었다. 뒤를 이어 1644년에는 학준(學俊)스님이 선당을, 1650(효종1)년 도전(道佺)스님이 정문을 건립하였으며 1658년 승해(勝海), 정명(正明)스님이 흥회루(興懷樓)를 건립하면서 가람의 정형을 갖추게 되었다.
[수타사 현판의 흥회루]
이후에도 수타사의 불사는 계속되어 1670(현종11)년 정지(正持).정상(正尙).천읍(天揖)스님이 대종(大鐘)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1676(숙종2)에는 여담(汝湛)스님이 사천왕상을 조성하였다. 그 뒤 여민(汝敏).지해(智海).지행(智行).성민(性敏),찬징(贊澄),선찰(禪察),성념(省念),상흘(尙吃)스님 등이 163(숙종9)년까지 계속해 청련당(靑蓮堂), 향향적전(香積殿), 백련당(白蓮堂), 송월당(送月堂) 등의 당우들을 차례로 중건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흥회루 건물에 걸려있는 '수타사' 현판]
현재의 명칭 수타사로 절 이름을 바꾼것은 1811(순조11)년의일로 수다라는 이름이 좋지 못하다고 하여 아미타불의 무량한 수명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뒤 1861(고종15)년 윤치(潤治)스님이 중수를, 1878년 동선당(東禪堂)을 다시 세우고 칠성각을 신축하였다.
[전각 내 걸려 있는 '흥회루' 편액]
또한 1976년 심우산방(尋牛山房)을 중수하였고, 1977년 삼성각을 건립하였으며, 1992년 원통보전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홍천 <수타사 소조사천왕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이다.
이 불상은 조선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사천왕상인데, 크기는 각각 3m가 넘는다. 나무로 심을 만들어 새끼줄로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형태를 만들고 채색한 것이다. 머리 뒤쪽의 불꽃모양이나, 손에 들고 있는 각종 물건 등은 부분적으로 나무를 사용하였다.
[지국천과 중장천]
사천왕상은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불교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신이다. 입구 오른쪽에는 칼을 들고 있는 동방의 지국천과 용.여의주를 쥐고 있는 남방 중장천이 배치되어 있고, 왼쪽에는 악기의 일종인 비파를 켜고 있는 북방 다문천과 긴 막대기 위에 깃발을 단 당을 쥐고 있는 서방 광목천이 있다. 모두 눈을 부릅뜬 험상궂은 얼굴에 갑옷을 입고 발 아래에는 여러 가지 모습의 악귀를 밟고 있다.
[광목천과 다문천]
수타사의 연혁을 적어 놓은, 수타사사적기에 강희 15년에 사천왕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676년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거의 확실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도내에 몇 되지 않은 사천왕상 중 하나여서 사천왕상 연구의 기준 작품으로 그 가치가 높다.
[보물 제11-3호 수타사 동종]
홍천 <수타사 동종>은 보물 제11-3호이다. 다음은 동종의 설명이다.
몸통 밑 부분에 1670년(현종 11)에 만들었음을 알려 주는 문구가 있어,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시대 중기의 종이다.
[종의 당좌 부분]
종의 몸통 위 부분에는 인도의 옛 글자인 범자(梵字)를 새겼다. 그 아래에는 구름 위에 서서, 양손으로 길다란 연꽃 가지를 쥐고 있는 4구의 보살입상이 있다. 보살입상 아래에는 종과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빙돌려 있는데, 종을 만든 시기와 종을 만드는데 참여한 여려 사람들의 이름이 각각 네모난 틀 안에 새겨져 있다. 그 아래로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가 4개 있는데, 마치 불꽃같이 화려한 모양이다.
[연꽃가지를 쥐고 있는 보살]
이 종은 당시 가장 유명한 종을 만드는 장인이었던 사인(思印)비구가 주도하여 조성한 것이다. 다른 종들은 몸통과 종을 거는 고리 부분을 한꺼번에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종은 따로따로 만들어 붙이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처럼 만든 사람과 만든 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고, 보존상태고 거의 완벽한데다가 제작 방법도 독특하여 조선시대 중기의 범종 연구에 중요한 작품이다.
[대적광전]
수타사 <대적광전> 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7호이다.
이 사찰은 708년(성덕왕 7) 우적산 아래에 일월사로 처음 지어진 것을 1569년(선조 2) 현재의 위치인 공작산으로 옮기고 이름을 바꾸었다.
[대적광전 앞 석주 - 등의 용도로 쓰인듯 헌데,..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절이 완전히 불타 버리고 40여 년간 폐허로 남아 있었는데, 1636년(인조 14) 공잠대사가 대적광전을 다시 짓고, 그 후 1683년(숙종 9)까지 여러 건물들을 계속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본전인 대적광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양식 건물이다.
[대적광전 내 화려한 닫집과 '적멸궁' 현판]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모습을 간직한 공포의 모습과, 조선 후기의 모습을 보이는 내부 살미첨차의 판재화, 연봉장식 등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비교적 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기단, 지붕, 몸체 등이 잘 조화되고 절제된 구성으로 단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용마루의 한가운데에 청기와 2개를 올려놓았다.
[대적광전 뒷 편의 삼성각 - 돌 틈으로 담아 보았다]
사찰을 거닐던 외국인 스님에게 청기와 2개에 대해 물어 보았으되 연유를 잘 모른단다. 아마도 내력을 잘 아는 주지스님 외에는 모두들 잘 알지 못하는 듯 싶다. 수타사에 와서 대적광전의 닫집만 보아도 보람을 느낀다는 말처럼 정말 화려하고 섬세한 작은 궁궐을 보는 듯 싶었다.
[보장각(좌)와 목판보관 전각]
아래 영산회상도, 지장시왕도와 <월인석보> 보물 제745-5호는 보장각이 잠긴 상태라 관람할 수 없어 기록만 해 보았다.
홍천 <수타사 영산회상도> 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2호이다.
이 불교회화는 1762년(영조 38)에 그려진 것이다. 비단 위에 그려졌으며, 크기는 가로 263cm, 세로278cm이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 부처가 영축산에서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주변에 설법을 듣고 있는 무리들이 배치되어 있다.
[흥회루 처마 밑에 걸려 있는 수타사 약사]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앉아 있는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 앞에 놓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어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불상의 앞쪽 좌우에는 갑옷을 입고 불교를 지키는 사천왕이 2구씩 모두 4구가 서 있는데, 손에는 칼, 탑, 악기 등을 들은 험상궂은 모습이다. 화면 하단 중앙에는 직사각형의 난을 마련하여 만들어진 시기, 그린 사람의 이름 등을 적어 놓았다.
[어떤 내용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정확한 제작 연도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앙의 불상을 중심으로 주변에 설법을 듣는 무리들을 빈틈없이 채우는 조선시대 후기 불교 회화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홍천 <수타사 지장시왕도> 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3호이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 영조 52년(1776)에 그려진 그림이다. 비단 위에 그려졌으며, 크기는 가로 205cm, 세로 186cm이다.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70구에 달하는 각종 상들이 좌우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다.
[흥회루 내 법고]
중앙의 지장보살은 깍은 머리에 투명한 두건을 쓰고 있으며, 왼손에는 기다란 지팡이를, 오른손에는 여의주를 들고 있다. 그림의 앞쪽에는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역할을 하는 시왕이 각 5구씩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관을 쓰고 손에는 길다란 홀을 들고 있다. 구름에 둘러싸인 앞쪽에 있는 인물은 작게, 그 위쪽에 위치한 무리들은 상대적으로 크게 묘사하고 있어, 위로 갈수록 인물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중앙의 지장보살에게 모아진다. 화면 아래 가운데 부분에는 사각형의 난을 마련하여 만들어진 연대, 시주자, 그린 사람의 이름 등을 적어 놓았다.
정확한 제작 연도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도에 남아 있는 지장시왕도 중 제작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이어서 지장시왕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수타사 앞 하천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는 삼층석탑]
<수타사 삼층석탑>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호이다.
이 탑은 단층 기단의 3층석탑이다. 기단부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고, 1층 몸돌에만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다. 2층과 3층의 몸돌은 없어졌고, 지붕돌의 추녀 부분에서 심하게 위로 올라갔다. 지붕돌 받침은 2단과 3단으로 되어 있으며, 상륜부(탑의 맨 위에 놓인 장식)는 모두 없어지고 3층 지붕돌에 찰주를 세웠던 구멍이 있다. 탑의 맨 꼭대기에 있는 둥근 돌은 탑과 관련 없는 것을 후에 얹어 놓은 것이다.
[석탑 주위로 둘러진 석축]
현재의 수타사는 1569년(선조 2)에 중창한 건물로, 덕치천으로 불리는 개울 건너에 있다. 이 탑이 있는터가 먼저 세워진 절터로 보이며, 원효에 의하여 일월사로 창건되었다는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단지, 절로부터 약 8km 상류에 매우 큰 3층석탑이 무너져 있는데, 그 곳이 원래의 수타사 터이고, 이 탑이 있는 곳이 후에 중건했던 절터가 아닌가 한다. 고려 후기에 세운 탑으로 추정된다.
[암자 같기도 하고,.. 우측으로 삼층석탑이 위치한다]
여타의 석탑을 보건데 이렇듯 튼튼하게 석축을 둘러 탑을 보호하고 있는 구조물은 보기가 흔치 않을 듯 싶다. 앞쪽으로 작은 출구를 제외하고는 사방으로 둘러진 석축의 두께도 제법 두꺼워 석탑의 보존에 힘쓴듯 보여진다. 탑의 좌측으로 작은 암자로 보이는 아담한 건물이 있다. 사찰의 부속건물일듯 한데,..
[사찰 입구의 좌측 부도군]
<수타사 홍우당 부도>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호이다.
이 홍우당 부도와 같은 유형은 고려말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전국적으로 만들어지는 대표적인 양식이다. 고려말까지는 지대석(기초부에 까는 받침돌)만이 사각형이고 모든 부재(탑의 각 부분에 쓰인 재료)들이 8각형인데 비해, 조선시대에는 부도의 가운데 부분인 탑신부가 둥근 원형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의 지공.나옹.무학대사 부도를 시작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사찰 입구의 우측 부도군]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전체적으로 6각형의 부도를 세웠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한 개의 안상(탑 면석에 팔면의 오금곡선으로 안쪽을 파낸 모양)을, 기단 중석의 각 모서리에는 작은 기둥을 새겨 넣었다. 기단 상대석에는 위로 향한 연꽃이 매우 힘차 보인다.
[공작산 생태숲 입구에서 본 대적광전]
홍우당은 1611년(광해군 3)에 태어나 1689년(숙종 15)에 돌아가신 스님으로, 비문의 글씨가 심하게 닳아 읽기가 어려우나, 남양 홍씨이고 법명은 선천임을 알 수 있다. 돌아가신 후 화장을 하였는데, 네모진 것 한 알과 둥근 은색 사리 두 알이 나오자 이를 봉안하였다. 비분은 스님이 돌아가신 다음 해인 1690년에 세워졌으므로 부도 역시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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