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곶이 다리 - 전관교(箭串橋)
서울 성동구 행당동과 성수동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석조 다리이다. 석교가 흔하지 않음에 있어 규모는 작지만 경기 고양시에 있는 <강매동 석교> 도 이와 비교해 볼 만 하다 여겨진다. 1967년 사적 제 16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보물 제 1738호로 재 지정되었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흐르는 곳에 위치한 이 다리는 조선시대에는 '살곶이벌' 또는 '뚝섬'으로 불리던 곳으로 임금의 사냥터와 군인들의 훈련장, 그리고 관마를 기르던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살곶이>란 지명의 유래는 태조와 태종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왕위계승 문제로 비롯된 아들 태종과의 갈등으로 함흥에 머물던 태조는 우여곡절 끝에 한양으로 돌아오다가 이곳에서 자신을 마중 나온 태종에게 활을 쏘았다. 그러나 태종이 차일을 치기 위해 세웠던 큰 기둥 뒤로 몸을 피하는 바람에 화살은 그 기둥에 꽂히고 말았다. 이에 태조가 천명임을 말하면서 이곳을 '살곶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살곶이 다리를 세우는 공사는 세종 2년(1420) 5월에 시작되었다. 당시 노상왕(정종)과 상황(태종)이 이곳 살곶이와 광나루 근처에 있는 전각으로 자주 행차했으며, 또한 주변에 매를 놓아 사냥을 즐기는 방응행차도 잦았는데, 이로 인해 개천을 건너야 하는 수행 중신들의 고충이 심하게 되자 상왕이 다리 공사를 명하였다.
하지만 석재의 운반과 기술상의 문제, 장마 기간이라는 어려움 등으로 공사는 기초공사만 마무리한 채 20여 일만에 중단되었다. 그 후 세종 4년(1422)에 상왕이 죽자 이궁 행차가 줄어들게 되었고, 당시 도성 안 개천 축석공사에 모든 인력과 기술이 투입되는 바람에 이곳의 공사는 50년이 지나도록 방치되고 말았다.
다리공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성종 6년(1475)에 이르러서이다. 이때의 공사는 이곳을 오가는 백성들을 위해서였는데,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동쪽의 광나루를 통해 나가면 강원도 강릉에 닿았고 동남쪽으로는 송파에서 광주.이천을 거쳐 충주로 나갈 수 있었으며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변에 닿아 선정릉(성종과 중종의 능)과 헌인릉(태종과 순조의 능)으로 가는 왕의 배릉(拜陵) 길이 되었다.
이처럼 교통상 세 갈래 중용한 통로의 길목이었던 까닭에 소재 고을인 양주목에 명령을 내려 공사를 시작했는데 지방의 민력만으로 추진하는 다리 공사는 힘겨운 일이었다. 당시 이 공사는 석재의 채취와 운반, 다리의 역학적.구조적 안정성 확보에 많은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는데 한 뛰어난 승려의 지휘, 감독으로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다리의 길이는 75.75m, 폭 6m인데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다. 《용재총화》에는 다리가 평지를 밟는 것과 같다 하여 성종이 제반교(濟盤橋)라 명명하였다는 내력이 기록돼 있다.<답사여행길잡이 - 서울> 현재 인근 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이용하고 있다.
콘크리트 기둥의 절반의 교량은 강폭이 넓어진 이후에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시기가 언제 인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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