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昌德宮] -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
<창덕궁>은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궁궐로 사적 제122호이다. 1405년 태종 때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법궁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궁성 밖에 마련된 임금의 거쳐)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이 곳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였다.
[돈화문 - 보물 제383호]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군 2)에 창덕궁이 재건되어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약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되었다.
[금천에 놓여진 금천교 - 보물 1762호]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금천교와 진선문]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 없이 사용하였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이 붙어 있어서 조선 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다.
[인정전 외행각 마당 - 앞쪽 숙장문 부근이 좁은 마름모꼴 마당]
이 궁궐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변형을 가져왔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1997. 12. 6일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인정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인정전 - 국보 제225호]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메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으며, 보물 제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른 아침부터 외국인을 포함한 관람객이 참 많았다]
영조는 재위 4년째인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돈화문 2층 돈화문루에서 헌괵례를 받았다. <헌괵례>는 싸움에 나간 장수가 적장의 머리를 왕 앞에 바치는 의식을 말한다. 이때 영조는 서울에 사는 노인들을 돈화문 앞에 초청하여 난의 원인이 당쟁에 있음을 지적하고 여기에 가담한 백성들에겐 중죄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돈화문 앞 광장은 이처럼 대민광장이기도 했다.
[인정전 내부 - 많은 전등과 커튼의 조화가 어딘가 부자연 스럽다]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역할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하며,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간다.
[선정문과 선정전을 이어주는 복도각의 기둥들]
1411년(태종 11) 금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라 하여 '금천교(錦川橋)'라 불렀고,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보물 제1762호 로 지정되었다.
[선정전 - 보물 제814호]
금천교를 지나면 진선문이 있다. 이 문에는 신물고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려라'라고 신문고 치는 절차를 밝혀 놓았다.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다 밟기도 어려웠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드므]
<인정전>은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덕궁의 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이 펼쳐져 있고, 뒤편에는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희정당 앞 - 차량의 진입을 위한 시설물이 부자연스럽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바닥에는 원래 흙을 구워 만든 전돌이 깔려 있었으나, 지금은 마루로 되어있다. 전등, 커튼, 유리 창문 등과 함께 1908년에 서양식으로 개조한 것이다. 인정문 밖 외행각에는 호위청과 상서원 등 여러 관청들을 두었다.
[희정당 - 보물 제815호, 구한말의 분위기가 물씬]
1405년(태종 5)에 창덕궁 창건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418년(태종 18) 박자청에 의해 다시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대조전 - 보물 제816호]
창덕궁 공사로 내시에서 1품 벼슬에까지 오른 박자청 - 인정전 외행각 마당은 서쪽 진선문 쪽이 넓고 동쪽 숙장문 쪽이 좁은 사다리꼴이다.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이 마당이 반듯하지 못하다 하여 박자청을 하옥시킨 일도 있었다. 그러나 숙장문 바로 뒤에 산맥이 있어 지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공간을 넓게 쓰기 위해 사다리꼴로 만든 것이었다.
[현대식으로 개조된 대조전 옆 수라간]
고려 말 내시 출신인 박자청은 조선 개국 후에 궁궐 문을 굳게 지킨 일로 태조의 눈에 들어 왕을 경호하다가 창덕궁의 건축 감독을 맡게 되었다. 창덕궁 뿐 아니라 제릉, 건원릉, 경복궁 수리, 청계천 준설, 경회루, 무악이궁, 헌릉 등 많은 공사를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이후 공조판서, 우군도총제부판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좌측 경훈각 - 대조전과 연결되어 있다]
<선정전>은 보물 제8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게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훈각 뒤뜰의 굴뚝]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을 비서실, 부속실로 이용했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청향각과 굴뚝]
선정전은 원래 왕의 공간이지만 왕비가 사용한 일도 있다. 성종 때 공혜왕후 한씨가 노인을 공경하는 풍습을 권장하기 위해 양로연을 이곳에서 베풀었다. 양로연은 80세 이상의 노인 전원을 대상으로 매년 9월에 열렸다.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는 이곳에서 친히 누에치는 시범을 모였으며, 중종 때는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기도 했다. 사관들은 왕비가 편전인 선정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을 남겼다.
[청향각 뒤 후원으로 이어지는 길]
<희정당>은 보물 제8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성정각 -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내의원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성정당의 누각 - 보춘정, 희우루 편액이 걸려 있다]
희정당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외모와 총명함은 물론이고 책을 좋아하는 모습까지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다고 전해지는 효명세자. 순조의 명으로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세력과 맞서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희망, 할아버지의 이상,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염원을 채우지 못한 채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으니, 정사를 돌본 지 겨우 3년 3개월 만이었다.
[성정각 일원의 승화루(좌), 낙선재 후원의 상랑정(우)]
<대조전>은 보물 제8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창적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낙선재 장락문 - 낙선대 일원은 보물 제1764호]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 옆 나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였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낙선재와 후원의 상랑정]
<성정각>은 세자의 교육장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내의원으로 쓰기도 했다. 성정각은 단층이지만 동쪽에 직각으로 꺾인 2층의 누가 붙어 있어 독특한 모습이다. 누각에는 '희우루, 보춘정'이라는 편액들이 걸려 있다.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라는 현판이 남아 있다.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현재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은 원래 높은 월대 위에 당당하게 자리한 중희당이 있었던 곳으로, 이 일대가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었다. 동궁일대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중희당은 1891년(고종 28)에 없어졌고, 중희당과 연결된 칠분서, 6각 누각인 삼삼와와 승화루 등이 남아 있다. 이들은 서로 복도로 연결하여 서고와 도서실로 사용하였다.
[석복헌]
<낙선재> 영역은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 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 등을 지어 수강재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수강재]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그 면모가 느껴지는 낙선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소박한 모습을 지녔으며,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다.
[수강재 옆 후원가는 문]
존경하는 할머니 대왕대비와 사랑하는 경빈을 위해 지은 집답게 세 채의 집 뒤에는 각각 후원이 딸려 있다. 낙선재 뒤에는 육각형 정자인 평원루(현재 상량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음)가, 석복헌 뒤에는 한정당이, 수강재 뒤에는 취운정이 남아 있다. 특히 낙선재 후원은 서쪽 승화루 정원과 연결되는데, 그 사이 담장에 특이하게도 원형의 만월문을 만들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샇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했다.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정원이다.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 풍경]
헌종은 첫 번째 왕비 효헌왕후 김씨가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다시 왕비를 간택했는데, 전례 없이 본인이 직접 간택에 참여하였다. 이때 삼간택에 남은 세 사람 중 헌종은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었으나, 결정권은 대왕대비에게 있었으므로 명헌왕후 홍씨가 계비로 간택된다. 이로부터 3년 뒤 왕비가 있는데도 생산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새로 맞은 후궁이 바로 경빈 김씨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석복헌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집이다.
[숙장문]
헌종은 그의 어머니 신정왕후의 평가대로 낮에는 물론 깊은 밤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옛 분들의서첩을 매우 사랑했다. 낙선재에는 온갖 진귀한 서적들이 가득하였다. 헌종의 소장 도서목록인 <승화루서목>에는 4,555점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서화가 918점이나 되었다. 서화에 대한 그의 지극한 관심을 말해 주듯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의 글씨이고, 평원루 현판은 옹수곤의 글씨이다. 이들은 모두 추사 김정희와 친교가 있었던 청나라 대가들이다.<안내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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