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송파(2) - #서울 석촌동고분군 #3호분 #근초고왕 #장군총 #돌무지무덤
서울 송파구 석촌동 61-6에 위치한 서울 석촌동 고분군<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은 사적 제243호 이다. 석촌동은 돌이 많아서 <돌마을>, <돌마리>라 불려지게 되었는데 한자명으로 표기하게 된 것이 지금의 지명이란다. 이유는 병자호란 때 청군이 이곳에 돌을 옮겨다 진터를 만들었다는 설과 백제시대 때 남한산성 쪽에서 돌을 가져다가 적석총을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일제 때 적석총을 없애기 위해 부근 주민들에게 적석총의 돌을 가져다 담장을 쌓도록 하였다고 한다.
[정문 앞 표지석]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폭 좁은 이 공원에는 백제시대의 대형 돌무지무덤(적석총) 7기와 함께 널무덤(토광묘), 독무덤(옹관묘) 등이 30여 기 이상 확인되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영향인 돌무지무덤이 석촌동에 산재한다는 것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문화적으로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3호분]
또한 이 고분군 지역에는 3, 4호분과 같은 대형분 이외에도 소형의 널무덤과 같은 평민이나 일반 관리의 것도 섞여 있단다. 그리고 서로 시기를 달리하면서 중복되게 형성된 것도 있어서 석촌동 일대는 오랫동안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의 묘지로 쓰여졌다는 내용이다. 공원을 동서로 관통하는 이동로가 3, 4호분 사이로 나 있고, 공원을 산책하듯 주변의 많은 시민들이 이 곳을 찾는다.
[동쪽 산책길에서 본 4호분]
2, 3, 4호분은 층단을 차츰 좁혀가며 쌓아올린 구조로 이러한 모양의 고분은 남한땅에서는 이곳에서 밖에 볼 수 없는 고구려의 무덤 형식이라고 한다. 한성백제시대의 다양한 무덤 형식 가운데 돌무지무덤이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는데, 무덤의 주인공이 당대 최고 지배층이었음를 말해 준다.
[서쪽 산책길에서 본 4호분 - 벤치에 앉아 휴대폰과 함께하는 어르신]
석촌동에서 제일 거대한 <3호분>은 제1단은 동서 50.8m, 남북 48.4m이고, 높이 4.5m의 규모로 형태는 사각형 기단형식의 돌무덤이다. 기단은 3단까지 확인되었으며, 그 시기는 3세기 중엽에서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와 주인이 불분명 하단다.
[제2호 움무덤]
출토 유물들이 4세기쯤의 것이라 하여 이 무덤을 백제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던 최 전성기인 근초고왕(375년 사망)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아직 확실한 근거는 없단다. 만주지역에 있는 <장군총 - 한변의 길이가 30m 가량>과 흡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보다 한 변의 길이가 사뭇 더 크다고 하니 그 주인공이 참으로 궁금하다.
[동쪽 산책길에서 본 2호분]
<4호분>은 한 변이 23~24m의 정사각형으로 연대는 3호분과 비슷한 시기로 보이나, 널무덤과 판축기법을 가미하여 순수 고구려 양식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준다. 그 밖에 1987년에 조사된 1호분의 경우 왕릉급의 대형 쌍분임이 확인되었다. 그 쌍분 전통은 압록강 유역이 환인형 고력묘자촌에 보이는 이음식돌무지무덤과 연결되고 있어 백제 지배 세력이 고구려와 관계가 깊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보여준다.
[남쪽의 1호분과 5호분]
<2호분>은 1985년 석촌동 백제 고분군 정비 계획에 따라 복원되었다. 그 전에는 돌로 덮인 봉우리 모습으로 주변에 민가와 돌담장이 세워져 있었다. 겉모습은 돌무지무덤이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백제식 돌무지무덤이다. 원래 흙무지무덤이던 것을 나중에 돌무지무덤으로 겉모습을 바꾼 제4호분과 달리, 처음부터 내부를 흙으로 채우고 겉에만 돌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
1987년 발굴 조사 당시에 돌무지는 기단부의 1m 정도가, 내부의 흙무지는 높이 3.8m 정도가 남아 있었다. 이를 토대로 3단의 계단식 돌무지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서북쪽 모서리 지점에서 나무널 1기가 발견되었는데, 움을 파지 않고 널을 놓은 뒤 작은 봉분을 만든 것이었다. 이를 통해 흙무지 널무덤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확장했음을 할 수 있다. 널무덤과 서남쪽 봉분 안에서는 3세기 말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굽다리 접시와 곧은입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동쪽의 산책로에서 본 남쪽의 5호분]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은 <A호 적석총> 또는 <외방내원형 적석총>이라고도 한다. 안쪽에 지름 11.4m의 흙무지 봉분이 있고, 겉모습은 한 변의 길이가 16m인 직사각형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무덤에서 볼 수 있는 둘레돌인 호석처럼, 안쪽에 둥근 원모양으로 열을 지은 깬돌이 봉분 자락에 놓여 있었다. 그 바깥의 자갈돌과 네모 모양으로 열을 지어 가지런히 놓인 테두리의 깬돌은 주변 1.2.3.4호분처럼 계단식 돌무지무덤의 흔적으로 보인다.
[서쪽의 산책로에서 본 5호분]
1987년 발굴 조사에서 돌널무덤 3기와 돌무지 움무덤 2기의 뚜렷한 윤곽이 안쪽 바닥면에서 발견되었으나, 돌무지무덤이 파괴된 뒤에 나중에 만들어진 무덤일 수 있어서 내원외방형 돌무지무덤과의 관련성은 분명하지 않다. 무덤안과 밖에서 각종 토기 조각과 손칼, 쇠못, 꺾쇠 등의 철기가 많이 출토되었지만, 모두 교란층이어서 관련 유물인지는 명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남쪽에서 본 1호분 - 남.북으로 두개의 무덤이 이어져 있다.]
<1호분>은 일찍이 집을 만들기 위해 허물어뜨린 탓에 훼손되어 구조를 확인하기 어렵다. 발굴 조사를 통해 남쪽 무덤 내부의 맨 아래 기단부가 확인되었는데, 무덤 2개가 남북으로 이어진 쌍분이었다. 북쪽 무덤은 3세기 중엽에, 남쪽 무덤은 3세기 말 ~ 4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좌-남쪽, 우-북쪽의 무덤이 이어진 가운데 부분]
남쪽 무덤과 북쪽 무덤의 기단부는 크기가 서로 비슷하며, 두 무덤 사이의 공간을 진흙으로 메우고 서쪽으로 길게 돌을 덧쌓아 두 무덤을 연결한 구조이다. 길이 20~30cm 크기의 깬 돌로 네 벽을 쌓았으며 바닥에는 10cm 안팎의 돌조각. 자갈 등을 깐 돌덧널 4개가 있었다. 가장 큰 돌덧널을 한가운데에 동서 방향으로 길게 놓고, 작은 돌덧널 3개를 북쪽 벽에 잇대어 동서 방향으로 나란히 놓았다. 무덤 내부와 주변에서는 백제 토기와 기와, 금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제3호 움무덤]
<5호분>은 지름 17m, 높이 3m의 원형 봉토분이다. 이 고분군에서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봉토분이라서 정비.복원할 때 내부조사는 하지 않고 봉분의 흙을 쌓은 방식만 확인하였다. 봉분은 흙을 다져 봉긋하게 쌓았으며 그 위에 강돌과 막돌로 한 겹 덮은 다음에 다시 흙을 얇게 덮은 특이한 형식의 무덤으로, 이를 즙석봉토분이라고 한다.
한강 유역 즙석봉토분의 대표적인 사례는 제5호분의 동북쪽 수십 미터 지점에 위치한 가락동 제1.2호분이다. 1969년에 두 무덤을 발굴 조사한 결과 하나의 봉분 안에 여러 개의 나무널과 독널을 각각 묻은 흙무지무덤으로 밝혀졌다. 석촌동 제5호분도 같은 구조로 추정된다. 즙석봉토분의 계통에 대해서는 토착민의 무덤 양식에 즙석이라는 고구려적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봉분을 만들고 지상에 주검 안치 공간을 둔 마한의 문화 전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동북 방향으로 본 2호분]
<제3호 움무덤(토광묘)>은 길이 208cm, 너비 58cm, 깊이 26cm의 네 모서리가 둥그스름한 직사각형으로 장축은 동북 - 서남 방향이다. 제2호 움무덤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바닥 시설은 없었으며,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 짧은목 단지 1개가 놓여 있었다. 원래 있었던 움무덤을 방수 보호 시설로 덮고, 바로 그 위 50cm 지점에 모형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남동 방향으로 본 4호분]
이들 고분은 대체로 3세기 중.후반경부터 5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년 동안 만들어졌으며, 특히 300~400년의 약 100년 동안은 백제 지배 세력에 의해 돌무지무덤 위주의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 후 공주 천도(475)까지의 백제 지배 세력의 무덤은 돌무지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바뀐다. 근처 방이동백제고분군과 가락동 등지의 무덤이 이러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석촌동 일대에는 널무덤.독무덤 등의 소형 고분이 계속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앞 4호분과 뒤 3호분, 멀리 제2롯데월드 신축현장]
문화재를 찾아 가는 여행을 하며 느끼는 것은 구한말.일제강점기에 참 많은 국보가 훼손되고 국토가 유린을 당하였구나 싶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보더라도 일찍이 사라졌던 나라들의 문명과 문화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도 견주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과거를 통한 미래의 추구,.... 우리의 역사가 내게 들려주는 소중한 이야기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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