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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행

#삼각산 #진관사 - 서울 은평 (3)

by 포리시스 2019. 4. 9.

#삼각산 #진관사 #나한전 #칠성각 #독성전 #백초월 스님 #태극기


   서울시 은평구 진관길 73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진관사는 예부터 서쪽은 진관사(西津寬)”라 하여 서울 근교 4대 명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사찰이다. 고려사여암전서등에 따르면 진관사는 신혈사의 후신으로, 1010년 고려 현종이 대량원군 시절에 왕위 계승과정에서 자신을 구해준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했다고 한다.


[사찰 입구의 '진관사 태극기' 표지석] 


   1090년 고려 선종이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베푼 후부터 여러 왕들이 참배하고 각종 물품을 보시하는 국가적 사찰이 되었다. 1397년 조선 태조는 진관사에 행차해 수륙사를 짓고 국행수륙재를 설행하게 하였고, 1442년 세종은 사가독서당을 진관사에 두고 집현전 학사들을 보내어 한글을 비밀리에 연구토록 하였다.


[사찰 안내도 : 25년 전에 이곳을 다녀간 듯 싶다]


   이후 진관사는 6.25전쟁으로 인해 나한전. 칠성각. 독성전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으나, 1963년 주지로 부임한 비구니 최진관 스님의 노력으로 옛 사격(寺格)을 복원하였다.


[극락교와 일주문]


   2009년 칠성각 해체복원 불사 중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 숨겨둔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이 발견되어 독립운동의 거점사찰임이 확인되었고, 2013년에는 진관사 국행수륙재가 중요무형문화재 126호로 지정되었다.


[일주문과 진관사 사적비.공적비]


   2006년 주지로 부임한 계호스님은 템플스테이체험관, 사찰음식체험관, 전통문화체험관을 건립하고 역사와 문화, 포교의 중심도량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종교와 인종을 넘어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전하는 마음의 정원을 지향하고 있다.


[아미타불]


진관사 소 삼존불상과 소 십육나한상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3, 144

   이 삼존불상은 진관사 나한전에 모셔져 있는 석가삼존불상이다. 진관사 나한전은 6.25 전쟁 때 칠성각. 독성전과 함께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세 건물 가운데 하나인데, 석가삼존불상은 이곳의 본존 불상으로 전해오고 있다.



   석가삼존불상은 현세불인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석가불상이다. 좌우 협시보살로는 왼쪽에 미래불인 미륵보살이 있고, 오른쪽에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이 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모두 부처님이 된다는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이다.


[제비꽃]


   가늘고 긴 상체, 갸름한 얼굴 등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도 보이지만 섬약하고 딱딱한 형태 등 조선 말기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전통찻집 연지원]


   석가삼존 좌우에 있는 흙으로 만든 16나한상은 다른 절의 16나한상보다 작고 다소 섬약해 보이는데, 이는 19세기 말 내지 20세기 초기 양식의 특징이다. 16나한상은 16구가 모두 갖추어진 예들이 적은 서울 경기지역의 나한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홍제루]


진관사 영산회상도와 십육나한도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5, 146

   이 불화는 진관사 나한전 본존불의 후불탱화로 모셔진 영산회상도와 16나한도로서, 석가부처님이 인도 마가다왕국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아래 좌측 문수원]


   그림의 중앙에 본존불이 앉아 있고 좌우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 제석과 범천, 그리고 머리 좌우로 가섭. 아난 등 6대 제자, 그 아래 좌우로 사천왕이 배치된 영산회상의 구도이다.


[향적당]


   붉은색 옷이 주조를 이루면서 옷깃에는 흰색이 많은 현란한 꽃무늬가 그려져 있어 전체적으로 밝고 화려한 편이다. 이들 상과 좌우로 배치된 산수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4폭의 16나한, 신중 등은 19세기 후반의 새로운 불화특징을 잘 보여 주는데,


[선유원]


   이러한 특징들은 새로운 명암법을 시도하고, 인물의 배치를 좌우 대칭으로 했으며 옆으로 긴 횡렬식 구도를 취한 것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이 있는 불화는 19세기 후반 서울 일대에서 활약하던 화승(畵僧) 진철(震徹) 비구가 1884(고종 21)에 그린 대표적인 그림이다.


[석탑]


진관사 산신도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149

   이 그림은 진관사 독성각에 모셔진 산신도이다. 언제 그려졌는지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독성각이 세워진 1907(융희 1)경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호랑이에 기대고 있는 산신은 붉은색의 옷을 입고 머리에는 높은 망건을 쓴 노신선의 모습이다.



   수염이 세밀하게 묘사된 산신의 얼굴은 마치 인자하게 웃고 있는 온화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하다. C자형으로 휘어져 있는 호랑이는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운 민화의 표범을 떠올리게 한다.


[나가원]


   그림은 밝은 진홍색과 녹색이 조화를 이루고 여기에 호랑이의 황색과 흰색 등이 어울려 밝은 느낌을 준다. 이 산신도는 산신도의 배경으로 즐겨 그려진 산과 나무를 생략하고 호랑이와 산신만을 대담하게 강조하면서 그 구도를 단순하게 한 점이 돋보인다.


[나가원 뒤 장독대 : 시골스러움의 풍경에 한참을 머물렀다.]


진관사 소 독성사와 독성도 :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11, 12

   진관사 독성각에는 나반존자상(독성상)과 독성도가 모셔져 있다. 1907(융희 1)에 독성각이 세워졌는데, 같은 해 독성도와 독성상도 함께 조성되었다.



   인도의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하고 있는 나반존자는 일명 홀로 깨친 성자라 해서 독성(獨聖)’이라 부르기도 한다. 존자상의 머리는 삭발했으며 얼굴은 유난히 크다. . . 입 중에 특히 뭉뚝하고 크게 생긴 코가 인상적이다.



   2m가 넘는 거대한 독성도는 산수를 배경으로 나이 든 비구가 오른손으로 땅을 짚고 왼 무릎은 세워 왼손으로 긴 주장자를 짚고 있는 자세가 편안해 보인다. 이 작품은 1907(융희 1)에 그린 화승 응석의 대표작이다. 이 독성상과 독성도는 1900년 전후의 독성상과 독성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그 가치가 크다.



진관사 독성전 :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34

   이 건물은 독성 즉 나반존자를 모신 건물로 1907(융희 1)에 짓고 1969년에 다시 지었다. 나반존자는 부처님이 열반한 뒤 중생을 구하고자 천태산에서 홀로 수도한 아라한을 가리킨다.



   조선 후기 사찰에는 나반존자와 산신, 칠성을 한 전각에 모신 삼성각을 지었다. 때로 나반존자만 모신 독성각을 짓기도 했는데, 진관사에서는 이의 격을 높여 독성전이라 불렀다. 건물은 간살이 좁은 단칸의 맞배집으로 크기가 아주 작다.


[적묵당 : 마음의 정원에서 한참을 뛰어놀던 아이]


   안에는 간소한 불단을 두고 소조독성(나반존자)상과 독성도, 산신도를 모셨다. 소조독성(나반존자)(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11)은 높이 37cm 가량 되는 작은 상으로 흙으로 빚어 색을 칠했다. 독성도(12)는 건물이 지어진 1907년에 그려졌다.


[대웅전]


   가로로 길게 구도를 잡아 그린 이 그림은 천태산을 배경으로 앉은 나반존자와 동자 등을 표현했다. 상궁 4인과 민간 부부 두 쌍이 독성전을 후원하고 공사는 승장이 맡았으며, 상궁이 시주해서 독성도를 그렸다.


[진관사 대웅전 주변 전각들]


진관사 명호스님 초상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8

   이 그림은 진관사 칠성각에 모셔져 있는 명호 스님의 초상이다. 원래 북한산의 인수사에 모셔져 있었는데, 이는 인ᄉᆞ사절명호불영뎡이라는 화기에서 알 수 있다. 그림 중심에는 온화한 인품을 느끼게 하는 인자하고 예지에 찬 얼굴과 훤칠한 모습의 명호 스님이 있고 좌우에 동자승이 그려져 있다.


[대웅전]


   그림에서 명호 스님은 푸른 감색 장삼 위에 붉은색 가사를 걸치고 있으며, 왼손에 긴 주장자를 짚고 오른손으로 염주를 굴리면서 경전 위에 올려 놓고 있는데, 덕이 높은 스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성 연대는 정확히 쓰여 있지 않으나 고승과 좌우 동자승 등 삼존구도의 영정과 희귀한 한글 화제, 온화한 고승의 형태적 특징 등에서 19세기 말기의 초상으로 생각된다.


[나가원 전경]


진관사 칠성도와 석불좌상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47

   칠성각에는 치성광후불도와 치성광석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1910(융희 4) 10월에 조성되었으므로 역사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칠성도는 옆으로 구성된 횡열식 구도인데, 그 중앙에 치성광불과 일광.월광 등 삼존불이 있고, 이 좌우로 앞줄에 칠원성군이 나란히 서 있다. 뒷줄에는 칠성을 부처님으로 변화시킨 칠불이 한 줄로 나란히 있는데, 이 가운데 한 분씩 바뀐 채 배치된 구도가 흥미롭다.


[시계방향 독성전, 칠성각, 나한전 : 6.25 전쟁 때 불타지 않았다는 전각들이다]


   전체적으로 높고 뾰족한 불상의 육계와 긴 얼굴, 얼굴과 팔 등의 금색, 성군들의 높은 보관과 보관의 금장식, 홍색 위주의 가사와 도포 등과 같은 것을 화사하게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나한전 아래 사찰 문화재 안내문들]


   칠성도 앞 정면에 치성광불로 모셔진 34cm의 작은 돌로 된 석불상이 모셔져 있다. 아기 같은 얼굴과 신체는 순진무구한 부처님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세기 말경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석불로 그 가치가 크다.


[나한전]


진관사 칠성각 :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33

   칠성각은 1907(융희 1)에 지어진 것으로 불교에 흡수된 민간신앙인 칠성신을 모신 건물이다. 진관사는 1900년대 초 크게 고쳐지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나한전과 독성전, 칠성각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다.


[소 삼존불과 영산회상도]


   예로부터 북두칠성은 재물과 재능을 주고, 수명을 관장하며, 비를 내려 풍년을 들게 하는 신으로 민간에서 널리 받들었다. 칠성각은 정면 3,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집으로 그 구조는 아주 간소하다.


[16나한상]


   안에는 뒷벽에 붙여서 불단을 놓고, 석불좌상과 칠성도, 영정(유형문화재 제148) 1점을 모셨다. 석불좌상(문화재자료 제10)은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신체와 얼굴 모두 아기처럼 작게 만든 것으로 보아 원래는 천불상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독성전(좌)과 칠성각(우)]


   1910년에 제작된 칠성도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칠성과 여러 성군을 그린 불화다. 진관사는 1012(고려 현종 3) 정쟁에 휘말린 현종을 도운 진관대사를 위해 세운 절이다. 조선시대에는 수률재를 열었던 수륙도량으로 명성이 높았다.


[칠성각에서 발견된 태극기]


칠성각에서 발견된 백초월스님의 독립운동 사료

   20095월 진관사 칠성각 보수작업 도중 오래된 태극기와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6월에서 12월까지 발행된 <독립신문>, <신대한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등 십 수점의 항일신문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독성전 독성도]


   태극기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제작하고 3.1만세 운동 때 직접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단재 신채호 선생이 상해에서 창간한 <신대한신문> 2, 3호와 그간 국내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자유신종보> 등의 항일지하신문은 매우 가치가 높은 사료들로써 등록문화재 제 4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명호스님 초상]


초월선사 진영

   초월스님은 칠성각에서 발견된 태극기와 신문을 일경에 체포되기전 급하게 숨겨놓은 것으로 밝혀졌으며, 독립자금과 인재들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면서 불교계 항일운동의 주축으로 활동했던 분입니다.



   수차례 체포되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가운데 1944년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하셨습니다1986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고 20146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