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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기행

#대전광역시 #제월당 #옥오재 #송규렴 #송상기

by 포리시스 2021. 3. 19.

제월당은 조선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송규렴이 숙종 2(1676)에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별당이다.

 

제월당과 옥오재 

제월(비 개인 다음의 맑은 달)’은 송규렴의 조상인 쌍청당 송유의 호 쌍청(맑은 바람과 밝은 달)’의 의미에서 따온 말로 조상의 맑은 기품을 닮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앞면 3, 옆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 지붕을 올렸는데, 이곳에서 손님을 맞거나 독서 등을 하였다.

 

옥오재는 제월당 송규렴의 아들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낸 송상기가 안채에 붙여 지은 사랑채 건물이다.

 

옥오깨어지더라도 나는 옥을 택하겠다.’라는 뜻이며, 여기에는 충성스러운 말과 옳은 뜻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다.

 

제월당과 옥오재는 살림집인 안채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가묘가 함께있어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고택이다.

 

송규렴(1630-1709)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도원이며, 호는 제월당이다. 이조판서 송국전의 아들로 회덕 읍내에서 태어났고, 송준길과 송시열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654(효종 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지평. 정언. 서천군수 등을 지냈다. 1674년 일어난 2차 예송으로 유배당한 스승 송시열의 신원을 주장하다 파면 당했다.

 

그 후 1694년 갑술옥사로 노론이 재집권하게 되자 다시 대사헌. 대사간. 동지중추부사. 예조참판을 지내고 1699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는 서인의 중심 인물로 정치적 변동에 따라 부침이 많았으나, 내외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

 

정치론에 있어서는 임금의 마음이 만 가지 변화의 근본임을 강조했으며, 성학이 베풀어지고 인심이 유행하는 사회를 이상으로 여겼다. 학문이 뛰어나고 회덕향약의 서문을 짓고 옥류각을 건립하는 등 향촌활동도 출중하여 송준길. 송시열과 함께 회덕삼송이라 불려다. 저서로는 <제월당집>이 있다.

 

송상기(1657-1723)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며 호는 옥오재이고, 예조판서를 지낸 송규렴의 아들이다. 송시열. 송준길에게 사사하고 28세 때 성시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보직되었다가 검열. 수찬. 부교리를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학식이 풍부하였으므로 홍문관에서 왕에게 드리는 글은 대게 그가 작성하였다. 그는 대사성. 충청감사 등을 역임하였고, 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판돈령부사에 이르렀으나 당쟁에 휩쓸려 신임사화로 강진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에 사망하였다. 저서에 <옥오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