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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한국의 서원 #필암서원 #사적 제242호 #하서 김인후 #고암 양자징 #장성군

by 포리시스 2021. 3. 22.

오랜 세월 묵묵히 학업하는 유생들의 모습을 지켜보아왔을 듯 싶은 은행나무 한 그루가 붉은색 홍살문의 옆에 꼿꼿이 서 있다.

 

홍살문 옆 은행나무와 서원의 정문 확연루 - 세계유산 표석

그리고 정면으로 궁궐의 대문마냥 높다란 2층의 누각이 있다. 이 서원의 정문인 <확연루>이다.

 

확연루에서 본 강당 <청절당>

한여름이면 이 누에 올라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넓게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무더위를 식히기에 더할나위없었겠다.

 

확연루와 청절당 사이의 뜰

1590(선조 23) 하서(河西) 김인후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졌으며,

 

청절당의 뒤편 - 보통 대문을 내다보며 강당의 앞이 형성되지만 이곳의 강당은 뒷편이다.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24(인조 2) 다시 세웠다.

 

확연루 - 현판은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씨

유생들의 소청으로 1662(현종 3) ‘필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1672(현종 13)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담장과 어우러진 청절당

1786년 김인후의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을 추가 배향하였다.

 

확연루 풍경

양자징의 본관은 제주, 자는 중명, 호는 고암이다.

 

양자징은 담양에 소쇄원을 창건한 양산보의 아들이다.

 

청절당 앞 마당 - 강당의 대청마루에서 북쪽으로 창을 열면 이렇듯 마당과 우동사와 내삼문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창을 북향으로 낸 것은 항상 임금에 대한 충의를 지키고 하서 김인후 선생의 도학과 절의정신을 마음 깊이 되새기며 학문수련에 정진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올랐으며, 1570년경 거창현감을 지낼 때 소쇄원에 고암정사를 지었다.

 

경장각

1591(선조 24) 석성현감으로 있을 때 아들 천회가 1589년의 기축옥사(정여립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음이 드러나 파직되었으나,

 

청절당 내 필암서원 현판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연로하여 자신이 출전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아들 천운을 의병장 고경명의막하로 보내 싸우게 하였다고 한다.

 

북향을 한 청절당 좌측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에도 호남지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사액서원이다.

 

청절당 우측

서원의 문루인 <확연루(廓然樓)>는 정면 3, 측면 3, 상하 18칸의 2층으로 된 팔작지붕으로 기와를 얹었다.

 

숭의재와 경장각

두 차례에 걸쳐 중.개수되었고, 문루의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이다.

 

진덕재

문루를 들어서면 정면 5, 측면 3, 15칸의 단층 기와집 강당인 <청절당>이 보이는데,

 

진덕재

이 건물에는 9칸 대청과 좌우 3칸의 협실이 있고, 대청에는 동춘 송준길의 편액이 있으며,

 

계생비

처마 밑에는 병계 윤봉구의 글씨로 사액된 필암서원이라는 편액이 있다.

 

장판각과 한장사

그 뒤편 서쪽에는 <숭의재>가 있고, 동쪽에는 <진덕재>가 있으며,

 

우동사와 장판각

숭의재 옆에는 3칸의 <경장각>이 위치한다.

 

장판각 창호

경장각에는 조선 12대 왕이었던 인종이 세자 시절 김인후에게

 

우동사

그려 하사한 <묵죽도> 목판을 보관중이었으나 도난당하였으며,

 

청절당과 주변 전각

이후 목판화를 참고하여 다시 제작한 목판은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숭의재

매년 4월에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춘향제가, 9월에는 추향제가 열린다.

 

진덕재

20197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